유럽의 향기가 느껴지는 그녀의 선물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나는 유럽의 향기를 느꼈다. 어릴 적부터 발레로 다져진 그녀의 우아한 몸짓에서 피렌체의 꽃향기가 날아든다. 인문학 동아리에서 만난 그녀는 나에게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메디치 가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길고 긴 메디치 가문의 이야기가 끝나자, 미스테리 스릴러물 같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역사를 설명해 주었다. 그녀와의 대화는 물 흐르듯 리듬을 타고 흘러, 자유롭게 옆 길로 샌다. 그렇게 역사 이야기를 하다가, 미술작품 설명을 하다가 음악으로 마무리한다.
합스부르크 공부를 하면서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 미술의 차이점까지 알고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에 신이 난다. 매주 토요일, 도서관으로 가는 길은 설렘으로 막힌다.
거대 서사시처럼 이어지는 그녀의 합스부르크 이야기가 마무리될 즈음, 그녀는 손수 만든 마들렌 빵을 가져왔다. 조개 모양의 마들렌을 집어 나에게 건네주는 손동작도 수줍은 조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이거 그렇게 달지 않아. 고소하고 쫀득하게 만들어 봤어. 음.. 프랑스 어느 마을, 공작의 시녀가 가리비 모양의 쿠키를 만들었데, 그게 루이 15세까지 전해졌다고 해. 그 시녀의 이름이 마들렌이었다나, 뭐라나..,”
그녀의 가늘고 긴 손가락 끝으로 마들렌이 들려와 나의 짤막하고 퉁퉁한 손가락으로 온다. 마들렌이 맛있었기 때문인지, 꼬리를 물고 끝을 모르는 그녀의 박식함 때문인지… 이유도 모른 채, 내 혀 근육은 마비가 되고, 침이 흐르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침을 참기 위해 입을 다물고 있는 내 모습은 웃기게 보였을까. 우습게 보였을까. 귀엽게 보였을까. 그녀는 웃으며 예쁜 포장지에 싸인 커피를 주었다.
“이거 내가 직접 로스팅한 거야. 포장지도 캔바로 디자인했어. 이쁘지?”
그녀가 로스팅한 커피 향은 13*20센티의 스탠드형 알루미늄 지퍼 봉투를 찢고 나올 듯이 강렬했다. 그 강렬함은 커피에 그녀의 몸짓과 유럽의 향기가 브랜딩 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얼른 집에서 이 원두를 그라인더에 갈아 없애 버려야 한다. 아니면 이 강렬한 향기에 내가 취해 미칠 것 같았다. 집으로 가는 길에 나의 벨로스타도 커피 향에 취했던 것인지, 가만있질 못하고 신호를 자주 위반했다.
그녀가 선물한 커피를 마시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만나고 내 주변이 유럽과 연결되어 감을... 나의 눈길은 어느덧 탁자 위에 레 미제라블 책으로 향했다. 내 손길도 눈길을 따라 그 벨벳 질감을 다시 만져보고 싶어졌다. 그 책은 그냥 책 자체가 예술작품인 민음사의 레 미제라블 특별 합본판이다. 프랑스산 벨벳 소재의 양장이 2천1백2십4페이지에 65만 5천4백7십8개의 단어를 품고 있다. 나는 숫자를 음미하며 다시 그 텍스쳐를 느껴본다.
나는 2007년 덕수궁미술관의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 합스부르크 왕가 컬랙션도록을 그녀에게 빌려주고, 답례로 레 미제라블 책을 선물로 받았다.
“서프라이즈, 준비했어. 좀 무겁다. 그치?”
그녀가 벽돌 두장을 겹쳐놓은 듯한 볼륨의 책을 두 손으로 나에게 건넸다. 책을 받는 순간의 나는 언젠가 그녀와 파리에 같이 가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녀와 함께 나누었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에 이어 고흐까지.. 언젠가 그녀와 함께 유럽의 미술관과 박물관을 충분히, 천천히, 둘러볼 것같다. 벨베데레 궁에서 프랑스식 정원과 영국식 정원을 비교하고, 상궁으로 돌격해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도 같이 볼 것이다.
그날이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꿈을 꿀 수는 있다. 꿈꾸는 동안 레 미제라블도 읽고, 그녀와 함께 읽었던 파리의 노트르담도 다시 한번 읽겠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부터 시작해 세계 2차 대전까지 공부하고 있다 보면 그때가 오겠지. 그녀와 유럽에 가서 이 모든 이야기를 다시 나눌 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