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빵야>
* 연극 <빵야>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스포주의.
어떤 것은 꼭 ‘발화’되어야만 한다. 그래야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고, 이런 뜻이 아니다. 무언가는 꼭 말을 해야만, 입이라는 목구멍을 타고 넘어와서 음성이라는 옷을 입고 타인의 귀라는 관객에게 전달이 되어야만, 그래야만 말하는 사람의 속이 시원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아무리 가슴속에 묻고 입을 꾹 닫아도 결국엔 한 번쯤은 ‘빵’ 하고 터뜨려 줘야 한다. 말로써만 해소되는 것들이 있기에. 그리고 보통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된다. ‘작가’라고 하는 것.
연극 <빵야>는 말이 많다. 굳이 희곡집을 뒤적거리지 않아도, 객석에 앉아 배우들의 입만 봐도 압도적인 대사량을 느낄 수 있다. 그중 말이 가장 많은 사람은 단연 ‘나나’다. 나나는 드라마 작가다. 필연적으로 말이 많게끔 태어날 수밖에 없는 캐릭터. 나나는 모든 것을 말해 준다.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과의 관계부터 스스로가 하고 있는 생각까지. 쉬지 않고 관객들을 향해 이야기한다. 빵야를 만나 작품 <트리거>를 집필하게 되었을 때도 나나의 입은 쉬지 않는다. <트리거>의 내용 및 가벼운 설정과 대본 지문의 일부를 입으로 읊어준다. 달변가 나나는 “너 누구야!”라며 나나를 경계하고 입을 꾹 다물고 있던 99식 소총 ‘빵야’의 마음도 끊임없는 대화 시도를 통해 열어내고야 만다. 왜 나나는 막이 내릴 때까지 쉬지 않고 말을 해야 하는 ‘투 머치 토커’여야 했을까.
말에는 치유 기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의 시작을 ‘하고 싶은 말은 해야 한다’는 뜻을 가진 문장들로 열었던 것이다. 극 중 인물들이 입에 담아내는, 정확히 말하면 나나와 빵야가 뱉어내는 모든 말들은 ‘치유’를 위한 발화에 가깝다. 1945년 2월, 인천조병장에서 장총으로 태어난 빵야는 ‘한국현대사’의 산물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주인이 아홉 번이나 바뀌는 동안 한반도의 역사도 폭풍처럼 전개된 만큼, 빵야의 일대기에는 현대사의 중요 키워드가 담겨 있다. 식민지 지배와 독립, 국가 분단, 이데올로기적 대립 등과 이로 인해 일어난 여러 역사적 사건으로 인해 우리는 ‘역사적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간다. 같은 역사를 공유하지 못한 타국의 사람들은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 한국인들의 핵심 정서는 현대에서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역사적 사건이 종결되었다고 해서 아예 마침표를 찍은 일이 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 트라우마는 주홍글씨처럼 남아 우리를 알게 모르게 괴롭게 하고 있다. 자신의 역사를 되짚는 과정에서 ‘PTSD’와 유사한 반응을 보이고 괴로워하던 빵야처럼. 그런 의미에서 빵야가 입 밖으로 모든 것을 꺼내놓게 된 것은 필연적 결과다. 굳게 다문 입을 여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렸을지라도 결국 뱉어내야 했다. 물론 나나는 극 중반, 작가로서 “비극적인 역사를 드라마로 재연해서 보여주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죠? 물어온다면 기억하고 기록하고 증언하는 의미가 있다. 라고 답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그건 거짓말에 가깝습니다.” 라고 말하며 역사 재현의 자격, 책임감 등에 대해서 진솔하게 털어놓기도 한다. 빵야 역시 “제대로나 찍으면 모를까! 순 엉터리! 전쟁을 팔아먹는 수많은 이야기. 아픔을 팔아먹는 수많은 거짓말. (중략) 그만 좀 찍어라. 그만 좀 찍어! 언제면 끝날까? 이놈의 전쟁판!” 라며 트라우마가 담긴 회의적 시선을 내비치기도 했고. 하지만 알지 않는가.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말하게 된다. 계속해서 우리의 상처와 아픔을 재현하고 다시 생산해 내고 기억하자고 한다. 이놈의 입을 멈출 수가 없다. 이 이유를 확실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이건 그래야만 겨우 해소될 수 있는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독한 역사적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고 치유하고 싶다’ 라는 사실만이 명확할 뿐이다.
입을 떼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겨우 털어놓고 빵야는 나나에게 말한다. “고마웠어. 내 이야기 들어줘서 고마웠어. 많이 무서웠었어. 조금 나아졌어. 나를 봐줘서 고마웠어. 조금이나마 털어놓을 수 있어서 좋았어.” 수많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제작 가능성’, ‘비현실적’이라는 칼들로 난도질당한 나나의 <트리거>는 그간 자신이 써 왔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서랍 안에 들어가는 결말을 맞이한다. 하지만 빵야에게 있어 <트리거>는 개인적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일련의 과정이었다. 아픈 상처를 묻어둔 채로 두지 않고 굳이 밖으로 뱉어냄으로써 다시 들여다보며 자신의 진짜 꿈을 찾게 되는 아름다운 여정이었다. 빵야는 ‘악기’가 되고 싶었고 나나는 <트리거>의 마지막 결말에서 그걸 이뤄주려 했다. 글을 쓰는 나나가 빵야에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결국 실패했잖아요. 나나는 드라마 계약을 따내지 못했고 <트리거>는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잖아요? 그래, 맞다. 차가운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한물간’ 드라마 작가 나나는 또 실패했다. 계약도 못 했고 돈도 못 벌었다. 미련하게 판권도 못 갖다 팔았다. 그렇기에 연극 <빵야>의 시작과 끝까지, 나나의 입이 쉬질 못하는 것이다. 수십 년 간 원치 않는 살인을 하며 상처를 받았던 빵야가 <트리거>를 집필하는 나나를 돕기 위해서 계속해서 이야기를 들려줘야 했던 것처럼. <트리거>가 빵야의 상처를 치유하는 작품이라면 <빵야>는 나나가 모든 실패와 과거를 발판 삼아 한 발짝 도약하기 위한 과정을 담은 것이다. 무언가를 완전히 극복해 내고 이겨내기 위해선 상처를 제대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기에, 나나는 과거의 자신과 본인이 만들어낸 캐릭터들을 곱씹는다. ‘교회처럼 기도하는 마음으로 소주를 마시는’ 양평해장국에서. 나나가 그 공간에서 기울이는 술잔에 담긴 것은 회고일까 아님 회개일까. 무엇이 되었든 그 ‘한 잔’은 한 걸음의 용기를 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나나가 빵야에게 멋지게 ‘안녕’을 고하고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무엇을 꿈꾸다 실패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전달하고 싶었다던 김은성 작가의 의도에 알맞은 결말이라고 느낀다. 작가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관객 고유의 것이니 말이다. 각자가 생각하는 나나의 새 출발이 질문에 대한 답이 되리라 감히 추측해 본다. 사실 그보다 나는 대답을 해 주고 싶다. “고생했어! 고마워. 내 이야기 들어줘서.” 라는 말에. 계속 무언가를 입 밖으로 쏟아내야 하는 사람의 방대한 이야기를 들었으니 가벼운 대꾸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나야말로 너의 이야기를 말해 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