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딸만 둘이다. 그래서 그럴까. 모친의 친가에 마음이 더 쓰인다. 왠지 용돈을 두둑이 챙겨드려야 할 것 같고, 명절 이외에도 자주 찾아가는 것이 도리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늘 일상을 소화하기 바빠서 쉽게 가보지는 못한다.
할머니가 사는 동네는 낙동강의 배후습지를 개간해서 만든 동네다. 차에서 내리면 고인 물 냄새가 난다. 또 그곳의 흙은 검은색이고 밀가루처럼 굽다. 한반도 지천에 있는 붉은 황토와 다르다. 골목은 비가 조금만 와도 질퍽해지고 맑은 날은 회색 먼지가 바짓단에 붙는다.
평평한 길을 따라 거친 시멘트벽과 좁은 길목이 미로처럼 이어진다. 어려서부터, 오돌토돌한 벽면을 만지면서 걷는 것을 좋아했다. 벽은 대게 무채색인데 집마다 특색이 있는 대문이 달려있다. 재질도 색깔도 다르다. 어떤 집은 앞을 지날 때 큰 개가 짖는 소리가 난다. 그 앞집은 허술한 나무문이 닫혀있고, 그곳에 사는 노인이 쓸 것 같은 낡은 유모차가 세워져 있다.
거기서 조금만 더 들어가면 전봇대에 허름한 조명이 가로등 삼아 붙어있는 곳이 있다. 그 아래 붉은 녹이 많은 초록색 철문이 보인다. 거기가 우리 엄마의 엄마 집이다.
철문은 내 가슴 높이까지만 뚫려있어서 확실히 숙이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 그 문을 밀고 들어가면 아주 작은 마당과 더 작은 화단이 있다. 마당은 외할아버지가 폐지를 수거하러 갈 때 쓰는 손수레와 몇 개의 토분으로 가득 차 있고, 화단은 대문보다 더 짙은 초록으로 가득 차 있다.
정확히 말하면, 꽃밭이었던 곳이다. 지금은 정체를 알 수 없는 화초들과 너무 커버린 미모사, 굵은 줄기를 가진 장미 덩굴이 있는 공간이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돌보지도 못하지만, 식물들은 기세가 등등하다.
지금은 짙은 녹색뿐이지만, 내가 어릴 적에는 이름 모를 꽃들이 많았다. 그래서 할머니 집은 비릿한 물 냄새로부터 자유로웠다. 집으로 들어가는 문은 옆으로 밀어야 열린다. 지금은 쓸모없이 넓지만, 예전에는 신발로 가득 찼을 현관과 그 공간의 두 배 정도 넓이를 가진 거실이 있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삼촌 방을 제일 좋아했다. 킹사이즈 침대보다 작은 방에는 우리 집에 없었던 게임기가 있었다. 그리고, 만화책방에 빌린 노릿한 책이 탑처럼 쌓여있었다. 거기서 시간을 보내는 게 참 좋았다. 작은방에 뭐가 그리 많은지, 큰 스피커를 가진 전축도 있었다. 거기서 머물다 오줌이 마려우면, 마당으로 나왔다.
국화가 만발해있는 뿌리 뭉치에 소변을 하고, 심심하면 우산이끼 주변에 숨어있는 콩 벌레를 잡았다. 개미를 잡아서 거미에게 밥으로 주기도 했었다. 그러다 답답한 마음이 들면, 잠자리가 많은 옥상으로 올라갔다.
화단 위로 구름다리처럼 노란 페인트를 칠한 철제 계단이 뻗어있었다. 가파르게 옥상으로 가는 길은 이뻤지만, 좁았고 쇳소리가 났다. 조금은 무서웠지만, 올라가면 나만의 비밀세상이 있었다. 위에서 불꽃놀이 같은 불장난을 해도 아무도 몰랐다. 고추를 말리는 평상 한편에 앉아 어른들의 잔소리를 피해 그저 멍하게 있기도 했다. 먼 곳으로 시선을 던지면 비슷한 모양의 단층 옥상들과 회색 슬레이트로 덮은 낮은 지붕들이 펼쳐져 있었다. 다들 비슷한 사연이 있을 것 같았고, 그저 모든 것이 잘 풀리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 생각을 했었던 아이는 자라면서 너무 커져 버린 미모사 나무처럼 무덤덤한 남자가 되어버렸다. 중학교에 다닐 때는 할머니 집에 가면 읍내 오락실에서 놀았다. 고등학교 때는 이제 실컷 놀았으니 공부를 해보겠다고 할머니집을 등한시했다. 대학교 때는 임용시험에 한 번에 붙어보겠다고 대학 도서관에 박혀있었다. 반백수였던 이후의 시간은 부끄러워서 갈 용기가 안 생겼다. 그러는 사이에 세월이 너무 흘러버렸다.
그런 못난 손자를 제쳐놓더라도, 그 오밀조밀한 마당은 여섯 남매에게 축복이었을 것이다. 우리 할머니는 그 마당에서 여섯 자식을 키웠다. 비좁지만 부족함이 없었다. 그녀의 허리가 굽기 전에는 마산 어시장에서 장사했었다. 습지에서 자란 채소를 도매로 산 뒤, 시외버스를 타고 가서 팔았다. 그 돈으로 고무신을 사고, 천을 때어 옷을 지어 입혔다. 그녀가 환갑을 넘었을 때, 운전면허증도 땄다. 고된 인생살이로 허리는 심하게 굽었지만, 봉고차를 몰고 다니며 눈빛만은 맑았다.
때때로 녹슨 것을 보면 그녀가 떠오른다. 불편한 몸으로 낮은 침대에 앉아 등불처럼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할머니가 떠오른다. 생각보다 많은 것은 녹이 슨다. 황토가 붉은 것은 흙에 있는 철이 녹슬어서 그렇다. 거의 모든 물질은 산소와 만나면 화학적으로 변한다. 할머니 집의 비릿한 검은 흙은 생명력이 넘치는데, 거기 위에 있던 것은 너무 빠르게 늙어버렸다. 나는 아직 아무것도 되지 못했는데, 세월이 그렇게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