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마지막 제사를 지냈다. 큰엄마의 말로는 그랬다. 그동안 명절 음식은 사촌 형수가 도맡아 했다. 할아버지는 창원군에서 손꼽히는 땅 부자였는데, 장자 상속을 택했다. 그것을 두고 형제간에 말이 많았고 관계가 틀어졌다. 덕분에 손자인 우리는 물려받을 유산은 없지만, 명절의 형식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어릴 적에는 추석을 기다렸다. 큰아빠가 많아서 좋았다. 용돈을 조금씩 받아도 금세 지갑이 두둑해졌다. 과수원의 초입에 있었던 북면 촌집은 명절이 되면 사람으로 가득했다. 평소에는 넓어 보였던 대청마루도 좁아 보였다.
흙바닥으로 된 부엌에는 엄마, 마산 큰엄마, 명서동 큰엄마, 진해 큰엄마가 있었다. 밖은 가을인데 거기는 기름 냄새로 들끓었다. 사랑방 아궁이에는 소여물이 아니라, 제사음식을 짓기 위해서 깨끗한 아궁이가 걸렸다.
마루에는 할아버지가 담배를 피우고 앉아 있었다. 마당에는 늙은 나무가 있었고 높은 곳까지 뻗은 가지에는 열매가 맺혀있었다. 단감이 아니라 홍시를 만들 때 쓰는 감이었다. 아직 푸른 감은 실했다. 시간이 지나면 노을빛으로 익을 터였다. 마당에는 참새들이 앉았다, 다시 날았다. 할아버지는 그 풍경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정성을 다하면 무엇이 든 된다고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그런 믿음을 가진 8남매가 봉숭아와 분꽃이 핀 오솔길을 따라 명절마다 모여들었다.
적게 벌었지만 평생 직장이 있던 시절이었다. 큰아빠들은 돈을 벌었고, 큰엄마들은 집안일을 했다. 아직은 남녀가 유별했고,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고 이야기했다. 근엄한 지아비가 있었다. 형편은 고만고만했다. 같은 드라마를 보고, 주말의 명화를 봤다. 매해 사소한 자랑거리가 생겼고 고만고만한 고민들이 있었다.
사촌들과는 과수원을 뛰어다니며 놀았다. 숨바꼭질을 하고, 나뭇가지를 주워서 칼싸움 놀이를 했다. 과수원의 비탈길에서는 땅을 파면서 놀았다. 뭔가를 묻어놓기도 했다. 그때는 보물처럼 여겼던 것을 용각산 통에 넣어서 찾지 못할 곳에 파묻었다. 받은 용돈으로 읍내 슈퍼에 걸어가서, 사탕을 사고 라이터를 사고 화약을 사기도 했다.
어제 사촌들과 나란히 앉아서 향이 타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런 풍경이 떠올랐다. 이제는 사는 형편도 다르고, 겨우 살다보니 모이기도 어렵고, 조상보다 더 소중한 것이 생겨버리는 우리들이었다. 하나 낳기도 빠듯한 세상에 살게 되었다. 사촌의 아내 중에서 북면에 온 사람은 나의 아내가 유일했다. 그게 미안했다. 그래서 술을 과하게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