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과 불신에 관한 내 정곡을 찌르다
매번 연출,배우,각본이 다 거기서 거기인 한국영화에 신물이 나버려 웬만한 한국영화는 믿고 거르게 된지 오래였는데, 아주 오랜만에 세련된 연출과 특유의 펑키한 매력을 제대로 갖춘 한국영화를 발견했다.
“메기”는 단편적인 여러 에피소드들이 모여 하나로 만들어진 옴니버스식 구성이 돋보이면서도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주제로 귀결되는 특징을 보이는 작품이다. 간호사 “윤영(이주영)”과 부원장 “경진(문소리)”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병원 X-ray실 에피소드, “윤영”의 남자친구인 “성원(구교환)”의 싱크홀 보수공사 에피소드, 그리고 “윤영”과 “성원” 커플의 갈등 에피소드까지. 짧은 러닝타임에 많은 소재와 메시지를 담아내려했다보니 이음새가 다소 매끄럽지 않은 느낌은 지울 수 없었지만 다이내믹한 구성과 재기발랄한 아이디어들로 인해 지루할 틈이 없어 소소한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특히나 오프닝 시퀀스에서의 X-Ray 섹스 스캔들 소재는 뭔가 벌어질 법한 사건이면서도 너무나 적나라한 묘사 때문에 꿀잼일 수 밖에 없었다.
“메기”를 이끄는 쌍두마차 주역 “이주영”과 “구교환”의 연기는 매력이 터지다 못해 이 배우들을 처음 보는 사람들마저도 입덕시킬 만한 강렬한 케미를 선사했다. “이주영”이란 배우의 존재감은 익히 잘 알고 있었지만 “구교환” 배우의 작품은 처음 봤는데, 리얼한 생활연기에 감탄이 나왔다. 뭔가 나사 하나 풀린 것 같은 똘끼 충만해보이는 “구교환”과 4차원이지만 뚜렷한 신념 속에 살아가는 것 같은 “이주영”의 연기가 만나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관객들을 이들의 묘한 매력에 빠른 속도로 스며들게 만들었다.
여기에 베테랑 연기자 “문소리”가 간간이 분량 펀치를 날려주며 양념을 더해주었고, “박경혜-권해효-오희준-던밀스-이주영”등 익숙한 얼굴의 조/단역 배우들의 등장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전지적 “메기” 시점으로 전달되는 스토리인만큼 내레이션으로 참여한 “천우희”의 익숙한 목소리도 꽤나 반가웠다.
전혀 관계없는 파편적인 이야기들 몇 편을 덧붙여놓은 것 같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론 “의심과 불신”이라는 키워드를 주제로 공통적인 메시지를 함께 전달하고 있다.
병원 부원장 “경진(문소리)”은 X-Ray실 스캔들 사건이 터지고 “윤영”을 제외한 모든 직원들이 아프다는 이유로 출근을 하지 않자 이를 거짓 변명이라 의심한다. “성원”은 여친이 해준 반지를 잃어버리고는 직장 동료가 훔친 것으로 오해하고, “윤영”마저 타인의 말로 인해 남친을 불신하게 되어 결국 헤어진다.
“의심”이라는 인간의 본능적이면서도 원초적인 감정이 피어나는 단계부터 자신의 몸 속 구석구석에 전이되어 거듭된 불신이 야기하는 악순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들을 스토리의 핵심으로 삼는다.
하지만 각각의 캐릭터들은 “의심”의 상황에서 각자 다른 행동을 취하게 되는데, 뒤늦게 믿음을 갖기도 하고, 반성과 후회를 하기도 하며, 끝끝내 잠식되어버리기도 한다. 감독이 “의심”이라는 키워드에 대해 정확하게 제시하고픈 메시지는 딱히 없었다고 본다. 그저 상황에 따라, 선택에 따라 결과가 어떻게 달라지고, 어떤 악순환이 찾아오는지, 그러므로 그 “의심”은 어느 선에서 끊어내야 하는지, 이러한 부분들을 가볍게 언급하고 싶었던 것 같다.
코믹하고 발랄한 템포로 흘러가는 작품이지만, 주여한 사회 문제들도 꼬집으면서 지나간다.
병원이라는 집단에서 X-Ray실에서 찍힌 섹스 스캔들 사진이 퍼지자 집단의 구성원들은 가해자인 사진을 찍은 사람을 색출해내려 하기보다는 사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찾아내려는 데에만 혈안을 기울이며 관심을 보인다. 이는 성범죄 사건이 발생했을 때 가해자보다 피해자를 보호해주기는커녕 오히려 관심이 쏠리게끔 피해자 중점으로 집중 보도를 하는 사회현상과 크게 유사하다.
극에서 여러 번 등장하는 ‘싱크홀’ 역시 현 사회에서 다뤄지는 주요한 재난문제 중 하나로, 위험사회가 시사하는 문제점을 언급하면서도 이를 청년 실업 문제와 함께 다뤄 누군가에겐 재난일 수 있는 상황이 다른 누군가에겐 기회와 축복이 될 수 있다는 사회적 폐단이 낳은 아이러니함 역시 보여준다. ‘싱크홀’ 사태로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던 “성원”이 결국은 자신마저 ‘싱크홀’에 빠지게 되는데, 이 역시 사회적 모순이 아니었나 싶다.
그 밖에도 재개발 반대 평화 시위를 하는 사람들을 짧게 보여주며 주택 문제도 언급하고, 의심을 발단으로 벌어지는 불신사회의 심화적 현상도 보여주는 등 짧은 러닝타임 안에 많은 사회적 문제들의 메타포를 담아내고 있는 작품이었다.
영화 엔딩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이 작품은 신선한 발상의 한국영화의 미래가 아직 밝다는 걸 보여준 보석같은 독립영화 정도로 생각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엔딩 시퀀스에서 “성원”이 “윤영”에게 뱉는 대사를 듣고는 정곡이 찔리다 못해 뒷통수를 한 대 정통으로 세게 얻어맞는 기분이 들었다.
너도 뭔가를 부풀리고 있다면, 엄청 큰 바늘로 찔러주고 싶다. 안 아프게.
이게 딱 나 자신한테 하는 얘기 같았다. 분명 “성원”이 “윤영”에게 하는 말인데, 이 장면에서만큼은 청자가 나 자신이였다. 내가 딱 몇 달 전에 “윤영”과 “성원”처럼 혼자만의 의심과 불신으로 가득 차 인간관계 하나를 파탄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관계 속에서 잘못 피어나게 된 의심의 불씨는 바이러스와도 같아서 한 번 몸에 퍼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린다. 멈춰야되는 걸 알아도, 이게 잘못됐다는 걸 알아도 이미 시작되어버린 이상 쉽게 멈춰지지가 않는다. ‘성원’의 이 대사를 지난 몇 달 전에 누군가 내게 해줬더라면, 나는 그 의심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영화를 보면서 대사 하나 때문에 정곡이 찔려 소름이 돋은 적은 여태껏 없었던 것 같은데, 이 대사와 이 장면은 너무도 나한테 하는 이야기 같았기 때문에 몰입감이 그 여느 때보다 남다를 수 밖에 없었다.
배우들의 개성있는 연기, 살아 숨쉬는 캐릭터들, 독특한 미장센, 레트로하면서도 힙한 신스 사운드로 만들어진 독보적인 분위기의 영화, “메기”. 전지적 메기 시점에서 흘러가는 이 귀엽고도 심오한 영화는 내 기준에선 상당히 신선하고 짜릿한 영화였기 때문에 쉽게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한국영화는 늘 뻔한 범죄 아니면 코미디라지만, 생각보다 괜찮은 퀄리티의 참신한 독립영화들이 그래도 꾸준히 나와주고 있는데, 나만 잘 몰랐던 것 같다. 내 편협한 생각도 지우고, 내게 행복한 발견을 선사해준, 그런 선물 같은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