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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는 말보다 사랑하는 것 같다는 말이 와닿을 때

‘~같다’에 대하여

by yoo


한 나라의 언어에는 공동체의 관습이 담겨있다고 한다. 맞는 말일 것이다. 한국어 화자들이 자주 쓰는 '우리'라는 단어를 두고 개인보다 집단을 중시하는 성향을 드러낸다고 말하면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한솥밥’이란 단어와, '식사하셨습니까.'라는 인사말을 예로 들면서 식문화를 중시하는 민족이라는 설명을 한다면 누가 틀렸다 말할 수 있을까. 다 맞는 말이다. 이런 해석은 결론지어 놓으면 언제나 명료해 보인다.


'우리 가족, 우리 집, 우리 누나, 우리 형... ‘ 수많은 예시를 둔 뒤에 한국인들은 '나'라는 개인을 중심에 두는 걸 두려워한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똑똑해 보일 순 있지만 재미는 빵점이다. 이런 관점으로만 본다면 언어는 도구이자 공동체의 표상 정도로 전락하게 된다. 언어는 이렇게 손쉽게 꼬리표가 달릴만한 고정체가 아닌 무궁무진한 아름다움의 가능성을 지닌 유동체이다.


‘내 가족’이 아닌 ‘ 우리 가족’이 한국인 화자들의 보편적인 표현으로 살아남은 건,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내 가족'이란 개념을 부정하거나 상상하지 못해서가 아닐 것이다. '나'에 대한 고민이 존재함에도 '우리'로 수렴되어야만 했던 과정이 있을 것이고(그게 집단주의 일 것이다) 그 경로를 상상하는 게 문학적인 접근이리라. 언어는 집단 관습의 표기물이 아니라, 집단의 실체들이 맹렬하게 투쟁하고 나서 남겨진 표지석이라고 믿는다. 이후에 남은 말들이 우리 인식을 대표하는 것이리라.


'~같습니다'라는 표현법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 이 역시 개인의 생각을 쉽게 표현하기 힘든 집단주의 사회의 흔적이라고 말한다면 손쉽다. 실제로 우린 그런 사회 속에서 살고 있으니까. 그런데 정말 우리 모두가 자신의 표현을 분명히 하는 걸 두려워하는 이유로 그 단어를 쓰는 걸까.


오래전 회의 시간 때였다.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던 선배가 소심하고 조용한 후배에게 묻는다. '괜찮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후배가 답한다. 선배는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묻는다 '괜찮은 생각인 거야? 생각인 것 같은 거야?' 후배는 얼굴이 발개진 채로. '괜찮은 방안입니다.'라고 말한다. 선배가 후배에게 분명한 의사 표현을 요구한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군기를 잡거나 면박을 주기 위한 화법이었다는 걸. 그 선배도 다른 윗사람이 물을 땐 '좋은 것 같습니다'라고 답할 것이다.


'~같다'를 달고 사는 한국인이지만 외국인들에 비해 정말 줏대 없고 자신감이 없다고는 믿지 않는다. 주변에 고집 센 사람들도 '~같다'란 말을 달고 산다. 그저 '~같다'는 관습적으로 대화를 마무리할 때 요긴하게 쓸 수 있는 용언일 뿐이다. 주관이 강한 수많은 사람들도 ‘~같다’를 쓰면서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할 줄 안다.


'~같다'는 메시지의 확신 정도를 드러낸다기보단, 커뮤니케이션 상대에 대한 배려 혹은, 정서적 마사지 정도로 보인다. 맞다고 ‘분명’ 생각하지만 당신 안에 이견이 있을 수 있으니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둘게요. 정도의 의미가 아닐까.


그런데 재미있는 건, '~같다'라는 의기소침해 보이는 단어가 아이러니하게도 분명한 확신을 드러낼 때가 있다는 것이다. 반대항을 생각해 보자. 내가 누군가에게 '그건 우리의 잘못이 아닙니다.'라고 말한다면 우리 마음에는 어쩌면 우리의 잘못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품게 한다. 반대로 '그건 우리의 잘못이 아닌 것 같아.'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느껴지는가. 여러 번 곱씹고 생각해 보아도 좀처럼 우리의 잘못이 아닌 것 같다고 내뱉는 것 같지 않은가.


‘나는 너를 진짜로 사랑한다.‘라는 문장보다 ’ 나는 너를 사랑하는 것 같아.‘라는 말에서 좀 더 진실한 사랑을 느끼게 된다. 사랑을 단언하는 자는 의심하는 상대를 달래거나, 핑계를 대기 위한 경우일 때가 많다. 조심스럽게 사랑을 고백하는 이는 자신의 마음속에 자꾸만 퍼지는 뜨거운 것에 감히 사랑이랑 단어를 붙일 수 있을지 수없이 고민한 뒤에 내뱉은 말이리라.


그러니까, '~같다'라고 말하는 건, 자기표현에 서툰 한국인들의 표상이 아니라, 단언이 주는 반동을 경계하면서도 오히려 은밀하게 단언의 의지를 품는 기묘한 단어라고 생각한다. 실상 그렇지 않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저 몇몇 단어를 사회 구조의 결과물로 손쉽게 결론짓는 것보다는 더 즐거운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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