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네셔널’ 중 단편 <무겁고 높은>
얼마 전 여의도 애플 스토어에 갔다가 신기한 풍경을 발견했다. 테이블 한편에 무언가를 뒤집어쓴 채 멀뚱히 서 있는 사람들이었다. 정체는 애플 비전 프로였고 체험할 수 있는 코너가 마련돼 있었다. 유튜브로만 접했던 것을 실제로 보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예약을 해야 가능한 듯하여 이내 마음을 접었다.
비전 프로는 애플이 내놓은 VR, AR 기기이고 쉽게 설명하자면 가상현실을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휴대기기이다. 커다란 안대 같은 기기를 둘러쓰면 가상현실이 실제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신기한 세상이다. 보이지 않는 것들마저 경험하게 해 준다.
생각해 보면 기술의 발전은, 특히나 미디어 분야에 있어서는, 체험을 좀 더 분명하게 구현하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영화가 처음 발명됐을 때 영상 속 달리는 기차를 보고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고 하지 않는가. 이미지 시대에선 느낄 수 없었던 체험이다. 게임은 어떤가. 게임을 종종 체험형 영화라고 말한다. 영화가 연속된 장면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며 감정을 이입하는 방식이라면, 게임은 세계 안의 주체가 되어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간다. 한 발짝 더 나아간 체험이다.
현행 매체 중에서 체험을 구현하는 데 가장 불리한 장르는 무엇일까. 여럿 있겠지만 소설이 그중 하나일 것이다. 상상과 감정의 전이라는 방식으로 체험할 수 있다곤 하지만 매우 수고스러운 노력이 필요하다. 게다가 어느 정도 지적 수준과 배경 정보가 필요하다. 그러니 자격 까진 아니어도 조건이 필요한 셈이다. 막말로 문자를 모른다면 세계 안에 입장조차 못 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여전히 소설을 읽는 이유는(물론 줄고 있다고 하지만) 다른 매체들은 줄 수 없는 체험의 방식을 제공하기 때문일 것이다.
김기태의 <무겁고 높은>은 소설적 체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작품이다. <무겁고 높은>은 탄광촌에서 역도를 하는 여고생 송희의 이야기다. 대회에 출전하지만 성적은 그저 그렇다. 역도로 대학을 갈 생각은 진작에 접었다. 송희의 목표는 메달이 아니라 100kg 바벨을 드는 것이다. 100kg은, 송희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꿈의 무게이지만, 대회에서 입상하기엔 턱 없이 부족한 무게이기도 하다.
역도 선수로서 마지막 대회라는 생각을 품고 대회에 참가한다 소설의 클라이맥스로 적당한 장소이다. (당연히) 우승에 실패하 혀만 마지막 남은 시도에서 100kg를 도전한다. 이미 소설에 젖은 독자라면 100kg를 들어 올리며 마지막 성취를 이뤄내길 바라지만 도전에는 실패했고 그녀의 역도 커리어 역시 끝이 났다.
대회의 종료와 함께 그녀는 그녀는 역도를 포기했다. 그렇지만 그녀의 진짜 마지막 순간은 좀 더 깊숙하고 고요한 곳에 준비되어 있었다. 그녀는, 아마도 자기 자신을 상징하는 '어떤 목소리'를 증인으로 삼고는 마지막 도전을 한다. 100kg의 바벨을 드는 것. 역도는 종목의 이름일 뿐, 그녀가 행하는 것은 들어 올림이다. 자신이 설정한 무게를 들어 올려 보는 것으로 진짜 마지막을 삼는다.
그녀가 100kg 무게를 들어 올리는 데 성공했을까? 독자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서라면 작가는 송희가 무게를 들어 올리게 했을 것이고, 인생의 비정함과 쓸쓸함을 부각하려 한다면 들지 못하게 끝을 냈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은 바벨을 들고 바닥을 밀어내는 순간까지만 묘사한다. 성공과 실패는 애초에 소설의 관심 밖이었다. 작가가 폐광촌과, 대회장을 지나 텅 빈 역도장까지 독자를 끌고 온 이유는 마지막을 대하는 송희의 마음을 체험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100kg, 문자로는 쉽게 가늠할 수 없는 무게다. 그녀가 성공한 94kg보단 분명 무겁겠지만 그 무게차를 쉽게 체감할 수 있을까? 94kg와 100kg의 무게 차이는 94kg을 들어본 자만이 느낄 수 있다. 영화라면, 게임이라면, 무게를 더하는 원판의 크기나 배우의 표정 연기로 차이를 둘 수 있겠지만 소설에선 그저 숫자로만 드러날 뿐이다. 그 차이를 구구절절 묘사하려 할수록 소설은 구차해진다.
소설은 두 가지 바벨의 차이를 드러내는 방식이 아닌 바벨 앞에 선 송희의 마음을 묘사함으로써 그 무게를 가늠케 한다, 그리고 그 둘의 무게는 저물어가는 폐광촌과 새로이 시작되는 스물의 삶, 지나온 것들과 다가올 것들의 간격에서 차이를 드러낸다. 바벨에 꽂힌 원판의 숫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게이다. '따지자면 나는 94킬로그램만큼은 이겼고 100킬로만큼 졌지' 소설의 표현처럼 성공과 실패 김쁨과 슬픔의 이분항은 희미해진다. 눈물을 흘린 후 바라본 세상처럼 세상의 경계는 블러처리가 된다. 그 희미함으로 더욱 구체적인 체험을 하게 하는 게 소설의 힘이다.
역도에서는 바벨을 들어 올린 뒤 이를 내려놓는 게 아니라 던지는 것이라고 한다. 던지기 위해선 들어 올려야 한다. 그렇다면 반대로 실패한 자들은 내려놓는 것일까. 주저앉거나 미끄러졌다 하더라도 실패자들은 던지지 못하는 것이다. 바벨은 내려놓아지고 던져진 건 역사의 몸일 뿐. 성공도 실패도 사람이 행한 게 아니라, 이뤄진 성공과 실패 사이에 던져진 게 인간일 뿐이다. 무겁고 높은, 제목부터가 소설적이다. 얼마나 높은지, 얼마나 무거운지, 이. 추상적인 단어는 눈을 감아야만 그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감각해 낸 것이야 말로 진정한 소설적 체험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