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이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휴대폰 속에 저장된 너무 작고 귀여웠던 어떤 순간을 들여다보다가…혹은 아이가 가진 습관 중 문득 아쉬움이 남는 장면을 마주할 때… 그렇다. 하지만 내 인생을 과거로 되돌릴 수 없듯, 아이를 키우는 일 역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내 키와 비슷해져 버린 아이는 이제 두 팔로 번쩍 들어 올려 안아 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니고, 그만큼 자라 버린 생각과 태도, 굳어져 가는 습관들 역시 다시 작게 접어 품에 넣을 수는 없는 일이다.
나도 엄마는 처음이라 아쉬움이 남는 일들을 하나씩 꺼내놓자면 아마 책 한 권쯤은 충분히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은 아이에게 해주지 못한 일보다 그래도 참 좋았었다고 생각되는 일, 다시 아이를 키운다 해도 꼭 다시 해주고 싶은 일을 떠올려본다.(요즘 방학이라 딱 붙어서 매우 다정하지 못한 엄마가 되어 죄책감이 좀 들어서 그런 것은 안 비밀) 그러고 보니 아이와 함께한 시간들 속에는 기다림과 실패를 경험하게 해 준 순간들이 의외로 많이 숨어 있었다.
기다림을 이해하는 시간(지는 법을 배우며...)
첫 번째는 바둑을 두게 해 준 일이다. 바둑은 학교에서 방과 후 수업으로 배우게 했는데, 하기 싫다고 해서 한 1년은 꼬셨던 것 같다. 사실 바둑은 아이에게 친절한 놀이가 아니었을 거다. 한 수를 두고 나서도 결과는 쉽게 드러나지 않았고, 조급하게 둔 수 하나가 한참 뒤에야 실수가 되어 돌아온다. 승부욕이 강한 아이는 늘 이기고 싶어 했지만, 바둑판은 언제나 아이보다 느렸으니까... 물론 그런 승부욕 덕분에 열심히 노력했고, 책을 사달라고 하더니, 학원을 보내달라고 했다. 그러다 보니 바둑판 앞에 앉아 집중하고, 의도를 파악하려 노력하는 시간이 늘었다. 기다리지 않으면 다음 수가 없고, 조금 손해를 감수하지 않으면 판이 이어지지 않는 게임 속에서 아이는 먼저 지는 법을 배웠고, 생각하고 존중하고 기다리는 태도를 배워나갔다. 아이 덕분에 아이들의 바둑 대회 공간에도 가보게 되었다. 그곳에 가면 물론 내 눈에는 빛나는 내 아이를 응원하느라 정신없지만, 그 많은 아이들이 바둑을 두며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승패를 인정하고 때로는 조금 아쉽게, 때로는 엄청 씩씩하게 걸어 나오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자리에서 울컥하는 마음을 누르며 박수를 보내고 있다.
기다림을 받아들이는 시간(기다려도 뜻대로 되지 않기에...)
두 번째는 식물 기르기다. 식물은 아이에게 가장 말이 없는 선생님이었다. 물을 준다고 바로 자라지 않았고, 매일 들여다본다고 눈에 띄게 달라지지도 않았다. 잎 하나가 나오는 데에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때로는 이유를 알 수 없이 시들어 버리기도 했다. 아이는 왜 죽었는지 물었고, 나는 명확한 답을 주지 못했다. 그 대신 우리는 다시 다른 씨를 심고 또 기다렸다. 기다림은 언제나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이와 나는 그 작은 화분 앞에서 함께 배우기도 했다.
기다림을 견디는 시간(포기하지 않는 마음을 배우며...)
마지막은 낚시다. 이건 얼마 전 이야기다. 둘째 아이는 하고 싶은 건 꼭 해야 한다. 그래서 난생처음 나도 얼음낚시라는 걸 하러 갔다. 설렘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낚시 대를 물에 담가 보기도 전에.. 얕게 얼었던 얼음이 깨져버렸고, 겁도 없이 두드려보지 않고 얼음으로 향했던 아이는 물에 빠져버렸다. 칼바람이 부는 영하의 날씨에 물고기 구경도 못한 채 허무하게 끝이 났다. 젖은 아이를 데리고 돌아오면서 아이가 우는 모습이 몹시 안쓰럽기도 하고, 허술한 안전 관리에 화도 났지만, 한편으로는 이 상황이 너무 어처구니없어서 웃음이 났다. 아이는 그날, 낚시를 해보지도 못한 채, 낚시하는 날을 다시 기다려야 했다.
우리는 얼마 뒤 다시 얼음낚시를 갔다. 이번에는 정말로 낚시를 하기 위해서였다. 아이는 추운 겨울 날씨 속에서 물고기를 잡겠다는 마음 하나로 다섯 시간을 버텼다. 나는 아이에게 물고기는 원래 초보는 잡기 힘든 거라고,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돌아가자고 여러 번 말했지만, 아이는 좀처럼 자리를 떠나지 않고 얼음 구멍 속 낚시 바늘만 쳐다보았다. 결국 그날, 아이는 물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아마 많이 속상했을 것이다. 기다렸지만 얻지 못했고, 버텼지만 결과는 없었다. 그래도 아이는 그 시간 속에서 기다리는 법을 배웠을 것이고, 기다린다고 해서 언제나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몸으로 배웠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이는 말했다. 다음에는 배낚시를 가고 싶다고... 아마 물고기를 꼭 한 번은 자기 손으로 낚아보고 싶은가 보다. 날이 따뜻해지면 그 약속을 지켜볼 생각이다. 낚시는 그렇게 아이에게는 기다림을 남겼고, 나에게는 기다리는 아이를 믿고 지켜보는 시간을 남겼다.
돌이켜보니, 아이에게 무언가를 빨리 잘 해내는 법보다 기다려도 괜찮은 마음, 실패해도 다시 해볼 수 있는 용기를 건넬 수 있었던 순간들이 더 오래, 더 소중하게 남는다. 하지만 그런 건 나도 잘 못하는 일이라 느끼게 해 줄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다. 바둑, 식물 기르기, 낚시.. 그런 경험들이 그래서 문득 더 고맙게 느껴진다.
아이를 키우며 엄마로서 자꾸만 후회하게 되는 일들은 지금도 조금씩 쌓여간다. 그럼에도 그 사이사이에 있었던 이런 좋은 경험들이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의미 있는 시간으로 되돌아올 것이라 믿어보고 싶다. 아마 이것이 아이를 키우며 내가 배운 기다림의 미학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