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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노엘 Oct 09. 2020

눈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을 담은 글
그리고...

사평역에서 임철우작가의 작품을 읽고


전남 완주 출신의 임철우 작가님의 기억 속에는 송이눈에 대한 추억이 누구보다 많은 분인듯하다. 사평역, 눈이 오면, 붉은 방의 세 작품을 관통하는 하나의 배경 이미지는 눈이다.

한겨울 소복소복 쌓이는 함박눈이 주는 로맨틱하고 사랑스러운 이미지 대신에 삶 속의 아픔과 추억과 불합리와 부조리를 지닌 또 다른 눈에 대한 이미지를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있다.

사평역의 눈은 우리들의 삶 그 자체이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로 시작하는 사평역은 곽재구 님의 ‘사평역에서’의 한 구절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처럼 각자의 인생 스토리들을 간직한 채 언제 올지 모르는 막차를 기다리듯 늘 다가오지 않는 미래의 그 어떤 것을 기다리는 우리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하나하나의 가슴속에서는 말하지 못할 아픔과 슬픔과 걱정들로 가득하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과 한 공간을 공유하고 스치듯 지나가는 삶 속에서 우리는 그 말하지 못하는 많은 것들을 알지 못하고 사람들을 판단한다.

그 누구도 섣부른 판단으로 누군가를 단정해서는 안된다.

사평역의 눈은 우리 삶 속 깊이 내려앉은 말하지 못하는 애환이 녹아든 눈이다.

‘흐유, 산다는 게 대체 뭣이 간디.’

그 말꼬리를 붙잡고 저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삶에 대한 모습들은 하나같이 다르다.

산다는 일은, 삶이란 각자가 자신의 도화지에 그려놓은 그림과 같다.

중년 사내는 산다는 일은 그저 벽돌담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폐쇄된 공간, 그곳엔 시간 마저도 흔적을 남기지 않는.

농부는 삶은 흙과 일뿐이라고 말한다. 계절도 없이 쳇바퀴로 이어지는 노동.

서울 여자에게 삶이란 돈이라고 정의 내렸다. 가게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돈으로 보일만큼 자본주의의 본질인 노동과 돈의 맞교환이 삶이라고 생각한다.

춘심이에게 산다는 것은 별것 아닌 것이며 생각하기도 싫은 것이다. 취하면 울기도 하지만 그 까닭을 알지 못하는 것.

대학생에게 삶은 이 세상과 구별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스물셋 나이에 세상 돌아가는 내력을 모르고 아니 모른척하고 산다는 것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행상꾼 아낙네들에게 산다는 일은 허허한 길바닥만 같다. 시골사람들 앞에 펼쳐놓은 싸구려 옷가지 같은 것인지도 모르는 것이 삶이라고 생각한다.

기차역 대합실이라는 공간을 매개로 에피소드식구성으로 이야기를 엮어가는 작가는 공간 안 모인 사람들의 모습과 이야기를 통해 어떤 답을 주기보다는 독자들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져주는 듯하다.

당신의 삶은 어떤가요? 당신은 삶의 의미가 뭐라고 생각하나요?

책을 덮고 작가가 던진 질문에 답을 구하기 위해 한동안 머릿속의 생각들이 복잡하게 흘러감을 느꼈다.

나에게 삶이란.... 단 한 번도 명료하게 정의를 내려본 적인 없는 것. 아니 솔직히 말하면 피해 다녔던 질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꼭 나만의 삶에 대한 정의를 한번 내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져보았다. 그리고 어렵게 질문에 대한 답을 만들어 보았다.

나에게 삶이란 롤러코스트다.

어린 시절 놀이동산은 언제나 설레는 공간이었다.

그곳에서도 가장 길고 멋진 롤러코스트는 가슴 떨리는 최고의 도전이었고 짜릿함이었다.

그 누구도 그것을 꼭 타야만 한다고 강요하지 않았지만 두려움과 떨림을 은근히 즐기며 타고나서는 해냈다는 성취감에 가슴 뿌듯한 자신감을 얻고는 했다.

우리 삶 속에서 가슴 떨리고 두려운 일은 무수히 많다.

아니 삶의 매 순간이 가슴 떨리는 선택의 순간인지도 모르겠다.

올라갈 때의 세상을 다 얻은 듯한 즐거움 뒤에 내려감의 아찔함. 완주 뒤의 뿌듯함.

롤러코스트에 올라타지 않으면 감히 느낄 수도 체험할 수도 없는 것을 스스로 선택하고 사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 나는 생각한다. 나이가 들어서도 아이들과 놀이공원에 가면 젊은 청춘들사이에 줄을 선다. 그리고 보란 듯이 소리 지르며 그 짜릿함을 온몸으로 체험한다. 내 나이 10년 뒤에도 20년 뒤에도 30년 뒤에도 새로운 것에대한 끝없는 도전은 롤러코스트처럼 짜릿한 쾌감으로 나를 살아있게 만들어 줄 것이라 생각해본다.

오늘도 내일도 도전하는 삶. 롤러코스트의 삶.

내가 생각하는 삶에 대한 정의이다.

‘눈이 오면’에서 눈은 세월의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눈. 추억 소환의 눈이다.

남편을 잃고 또한 큰아들을 잃고 모질게 살아낸 세월 속에서 묻어둔 추억과 기억이 어머니의 가슴속에 맺혀있다가 조금씩 토해내듯 올라온다. 치매와 함께.

‘찬우 야이. 어서 꼬두메로 돌아가자이. 너희 아버지랑 찬세가 얼마나 기다리겠냐. 더 추워지기 전에 싸게 싸게 집으로 가야 한단 말다.’

노인성 치매가 진행 중인 어머니의 입에서 과거의 한 시점으로 돌아가서 되뇌는 말은 아들에게는 믿고 의지하던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이고 아픔이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과거 추억 소환의 행동들(보리밟기)을 보며 아들은 결심한다.

‘좋아요, 어머니. 가십시다. 여한이라도 없게 내려가십시다. 오늘 당장 꼬두메로 가시자고요!’

어머니의 추억이 고스란히 묻혀있는 꼬두메를 어언 30년 만에 찾아가는 눈오는날 기차 여행.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은 모자의 추억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문을 열어 준다.

모진 세월을 버텨낸 어머니의 추억 속 꼬두메는 도시화된 공간 속에서 자취를 감춘 지 오래이다. 아버지의 묘도 찾을 길이 없다. 어머니는 추억을 더듬으며 꼬두메를 찾기 위해 잣고개를 오른다.

‘꼬두메는 이미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아무도 찾아갈 수 없는 망각의 땅일 뿐이다.’ 아들은 그것을 깨달았지만 현실 속의 그는 잣고개를 오르는 어머니를 찾으러 나선다. 열린 결말이 주는 여운은 독자에게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며 꼭 어머니를 찾기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가슴속에 내려앉으며 은빛세상을 상상하게 만든다.

오랜 세월 인고의 시간을 살아낸 어머니의 치매는 아들에게 당황스러움과 두려움으로 다가왔고 어머니의 기억 속 찾아가고 싶은 추억의 장소, 그 장소를 함께 찾아 나선 아들의 무겁고 답답한 현실이 은빛세상의 차가움과 함께 아프게 전해져 왔다.

마지막 작품 ‘붉은 방’은 역사 속에서 누구도 기억하지 않지만 개인에게는 잊히지 않을 치명적인 아픔을 남긴 권력의 폭력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붉은 방과 하얀눈은 색깔 대조를 이루며 차가움과 두려움, 아름다움을 가장한 무서움으로 느껴진다.

오기섭이라는 평범한 직장인이 지루하고 반복적인 일상에 따분함과 염증을 느끼고 있을 때 그 소박한 일상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도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다.

사상범으로 연행되어 감금, 폭행, 철저히 공권력에 짓밟히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으며 폐쇄된 공간 안에서 인간이 느껴야만 하는 두려움, 공포, 아무것도 저항할 수 없는 무력감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공안사건 담당 최달식 형사를 통해서는 인간으로서 어떻게 저런 고문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만큼 치를 떨게 했지만 어린 시절 빨갱이를 처단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목격하고 뇌리 속에 박혀 철저한 반공의식을 갖게 했다는 것이 이해가 되면서부터 그도 어떻게 보면 역사의 피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형사가 되고 공안 형사로서 본분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너무나 비인간적일 수밖에 없지만 그도 결국 인간인지라 모진 고문 뒤에 자백을 받고 나면 그 허탈감에 마음이 무거워 짐을 피할 수 없다. 모질고 악랄한 형사인 그도 결국은 하나님 앞에서 기도로써 위로를 받는다. 두 사람이 일인칭 시점으로 각자의 시각에서 상황을 이야기하는 다초점 서술이 독자에게는 서로의 마음을 정확히 들여다볼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있다.

하나의 사건을 다르게 바라보는 각자의 시각적 양면성을 볼 수 있어서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공포의 붉은 방에서 풀려난 오기섭은 일상으로 돌아오게 된 것에 기뻐하기보다는 그토록 그리웠던 일상이 낯설기까지 하다. 그것은 그가 그토록 권태로웠던 일상이 허위와 가면으로 가려져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라는 이름 속에 숨어있는 비민주성을 미처 알지 못했으며 사람들은 일상의 그림자에 가려있는  비민주성, 공권력의 폭력성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며칠 동안 공포의 공간이었던 붉은 방과 그가 풀려나던 날 내리던 하얀 눈은 대조를 이루며 아름다움으로 가려진 보이지 않는 공포와 아픔을 느끼게 해 준다.

우리들의 삶도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서 바라보면 온통 상처투성이 아픔인 것처럼 삶은 하얀 눈처럼 순결하지도 아름답지만도 않다. 그것이 진실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붉은 방처럼 각자가 가끔은 강금되는 고통의 방들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을 가져본다.

붉은 방을 읽으며 정의는 무엇인지, 진실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것처럼 정의는 시대에 따라 변하고 권력에 따라 변하는 것일까?

2020년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는 진정한 민주국가에 사는 것이 맞을까?

진실로 정의로울까?

갑자기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두렵기만 하다.

왜냐하면 나 또한 나만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정저지와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닌지 내가 바라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들이 많은 것은 아닌지 두렵기만 하다.

임철우작가의 세 가지 작품속의 눈은 슬픔이고 아픔이다.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하지만 그 또한 현실인……. 

그래서 더 가슴깊이 여운을 남기고 아프게 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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