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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노엘 Jul 25. 2020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

나는 책을 좋아한다.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은 내가 책을 아주 많이 읽을 것이라고 상상을 한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책 욕심이 많아서 책을 사 모으고 소장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래서 책방 나들이를 자주 한다. 서점에 들어설 때 코끝에 전해지는 종이의 향기가 좋다. 아침 출근길 베이커리의 갖 구운 빵 냄새가 식욕을 자극하듯 지적 허기를 북돋운다. 그리고 심적 편안함을 선물로 준다. 요즈음은 일주일에 한 번, 화요일마다 서점을 들린다. 신간 구경도 하고 트렌드도 살펴보며 베스트셀러는 적극적으로 구매해서 읽어보려 노력한다. 나에게 도움이 되었던 책이나 좋았던 글은 SNS 포스팅도 하고 추천도 하는 소소한 나눔의 즐거움도 좋아한다. 최근 따끈한 국내 신간 베스트셀러 중 자기 개발서 한 권을 읽었다. 한국의 책이 20개국 동시 출간이라는 사실과 한국 작가의 책이 전 세계에 깔렸다는 것이 멋져 보여서 캐나다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들에게도 읽어보길 권했다. 코로나 19 이후 크고 작은 변화의 두려움 속에서 자신만의 안정과 평화를 찾길 바라는 엄마의 마음으로 책을 추천했다. 며칠 뒤 영문으로 출간된 책을 어렵게 구해서 읽고 있다는 답변이 왔다. 대견한 아들이 고마워서 페이스 북에 포스팅을 했다. 그런데 기쁘고 행복했던 내 마음에 찬물을 끼얹는 안티 댓글이 하나 달렸다. 그는 소통하는 많은 페이스북 친구 중 한 명이었고 전직 출판업계에 종사하셨던 분이다. 평소에도 자기주장 강한 글을 쓰시던 분이라서 성격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내가 당하고 보니 기분이 언짢고 당황스러웠다.


그분의 댓글은 나에게 상처가 되어서 돌아왔다. 아들이 대견하고 고마워서 포스팅을 했을 뿐이고 내용 또한 지극히 개인적인 일상의 글인데 무엇 때문에 내게 불편한 자신의 감정을 오롯이 드러낸 것인지 궁금했다. 마음을 추스르고 그분의 의견을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무당 헛소리 같은 이야기를 자본주의 마케팅으로 풀어놓은 것에 내가 분별력을 잃고 추천하는 글을 올린 것이 몹시 거슬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나의 글을 내리라고 강요하고 있었다. 4,000명 정도의 친구들이 소통하는 사이버 공간에서 자신의 의견을 돌직구로 올려 버리다니 오지랖이 넓은 것인지 꼰대 기질이 있는 것인지 맘에 들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을 정리하며 한 템포 쉬었다가 그분께 답글을 달았다.     


“수천 년 전 소크라테스도 그 당시에는 무당 헛소리하는 사람으로 취급받고 결국은 사형을 당했겠지요. 무엇이 옳고 그른지 그 판단은 독자의 몫이고 내가 받아들이기 힘든 헛소리 같은 이야기도 누군가에게는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될 수도 있답니다. 고견 감사드리며 삭제 마시고 그냥 업데이트해놓으시기 바랍니다. 서로 다른 생각들을 자유롭게 나눌 수 있는 것만으로도 저는 감사합니다. 꾸준한 관심 부탁드려요.”웃음 모양 이모티콘 하나를  마침표처럼 날려주었다.   

  

그 이후로도 그분과 친구관계를 끊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내 글을 내리지도 않았다. 예전 내 모습을 짐작해 본다면 당장 친구관계 끊고 차단했을 인물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서 순간 웃음이 나왔다.

‘너 참 너그러워졌구나. 예전과 다른 너그러움이 어디에서 왔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인문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서로 다른 사람들의 모습에 너그러움이 생겨난 듯했다. 답이 딱 떨어지는 자연계열 공부를 좋아했던 나는 인문학을 접하면서 알게 되었다. 내가 얼마나 모르는 것이 많은 어리석은 인간인지를……. 내가 나를 느끼기 시작하자 솔직히 부끄러웠다.


그래서 아마도 타인에 대한 너그러운 마음이 조금씩 생겨나게 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일주일에 한두 번이지만 수업시간에 내가 몰랐던 것들을 들을 수 있고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배움이 좋았다. 초조하고 불안했던 20대가 아닌 평화로운 지금의 나이에 인문학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은 작은 내 마음의 그릇을 비워내고 새로운 것으로 채우기에 행복한 경험이 되었다.     


고전 읽기를 시작하며 세상 처음 보는 것 같았던 두꺼운 일리아스 책은 호기심이 아닌 두려움의 책으로 느껴졌다. ‘뭐가 이리 두꺼워. 대체 어떻게 이걸 읽어내지?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구먼.’

이해력 떨어지는 내가 일리아스를 읽는 모습은 아마도 글을 못 읽는 아이들이 동화책을 앞에 두고 그림만 넘겨보는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랑비에 옷이 젖듯 나는 조금씩 고전의 매력에 빠져 들었다. 이제는 고전의 문장이 내 가슴에 살며시 들어와 감동을 주기도 하고 아픔을 주기도 한다. 2년 후 일리아스를 다시 읽었다. 오래된 연인을 만난 듯 몹시 반가웠다. 아니 가슴이 설레었다. 이런 느낌 처음인데 싶으면서도 신기하게도 그런 설렘이 좋았다. 처음에는 낯설고 어려웠지만 이제는 너를 이해할 수 있어라는 마음으로 소중히 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낯설기만 했던 일리아스의 문장 하나하나가 꿈틀꿈틀 살아서 가슴속 깊은 곳으로 들어오는 것이 느껴진다. 내 가슴속으로 들어온 문장의 느낌을 나만의 언어로 기억해보고자 글을 쓴다. 그리고 내 삶을 돌아본다. 내가 예전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조금은 너그러워지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이제는 나에게 틀리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상처 받지 않으려 한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무엇이 틀린 것인지 한 발짝만 물러서서 바라본다면 그렇게 고집스러운 주장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내가 맞고 네가 틀린 것도 아니고 네가 틀리고 내가 맞는 것도 아니다. 우리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다르게 바라보고 다르게 생각할 뿐이다.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한 일리아스에는 주인공이 한 명이 아니었다. 등장하는 모두가 소중한 삶의 주인공이었다. 등장인물에게 편지글을 써보았다. 그들의 삶이 소중하게 다가왔다. 우리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하나하나의 주장을 담은 연설문은 각자의 드러난 생각이었고 누군가는 그 말을 정의롭게 외쳤고 누군가는 그 말을 경청했다. 페이스북에서 의견을 말한 그분도 자신의 주장을 외쳤을 뿐이고 나는 경청했을 뿐이다. 우리는 의견이 다를 뿐이다. 자신의 오만함을 인정하고 분노의 감정을 내려놓은 아킬레우스의 화해도 영웅으로서의 멋진 모습이었다. 본받고 싶은 부분이다. 그래서 나도 내 불편한 감정을 내려놓았다. 우리의 삶 속에게 용서란 얼마나 힘든 부분인가? 2500년 전 그들의 모습 속에서 닮아가고 싶은 나의 모습을 만들어 간다. 그리고 조금 더 너그러운 모습으로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 쿨하게 이야기해본다.     


“다른 의견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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