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만 원 속 어머님 마음을 만나던 날
도시에서만 살았던 나는 시골에서만 자랐던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서로 사랑한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따지지 않았던 나를 두고 친구들은 걱정 어린 눈빛을 보냈다.
1남 6녀의 외며느리 역할은 그 무게를 가늠할 수 조차 없었다. 세상 처음 해보는 육아와 살림은 하나부터 열까지 낯선 경험이었고 내 인생 최고 가시밭길의 시작이었다. 한 달에 몇 번 시골집을 찾아 연로하신 부모님을 찾아뵙는 것은 자식 된 도리임에는 분명했지만 며느리인 나는 힘들고 싫기만 했다. 시골 환경이 다 비슷하겠지만 마을의 개량된 집들과 우리 집은 많이 달랐다. 대문 옆 옛날 화장실, 불을 지피는 아궁이, 물을 끓이는 무쇠 솥, 격자무늬 창에 붙인 한지에 구멍이라도 뚫려 있으면 틈새 바람은 코끝을 시리게 만들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먹이고 씻기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어서 시부모님들이 계신 시골집에 내려갈 때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만 했었다.
하지만 시부모님들은 귀한 아들과 그보다 더 귀한 손주를 만나는 일이
세상 그 무엇과 바꿀 수 없을 만큼 행복해 하셨다.
그렇게 행복해하시는 두 분들 모습을 보면 힘들다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시골의 겨울은 도시의 겨울과 많이 달랐다. 한 번은 마당에 받아놓은 물이 꽝꽝 얼만큼 몹시 추웠다. 주방으로 들어오는 수도관이 얼어서 씻을 수도 없었고 마실 물도 나오지 않았다. 급히 다른 곳에서 물을 길어 와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렇게 추운 날씨에도 시아버님은 보일러를 방에만 틀어 주셨다. 주방바닥은 얼음같이 차가웠다. 양말을 신고 있어도 발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냉기는 뼈 속까지 시리게 만들었다. 그렇게 며칠을 차가운 시골집에서 지내다 돌아오면 나는 감기를 심하게 앓아야만 했다. 올라오는 길에 농사지으신 곡식들을 차곡차곡 넣어주신 가방을 풀어보지도 못하고 며칠 앓아누웠다가 며칠 뒤 정리를 한다고 가방을 풀었다. 한 줌의 찹쌀, 둥글고 알이 가지런한 콩, 붉은팥, 고소한 참깨, 그리고 가장 밑바닥에 낯선 봉투 하나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이건 뭐지?’‘ 궁금한 마음에 얼른 봉투를 열어보니 만 원짜리 서른 장이 들어 있었다. 웬 돈인가 싶었지만 내심 좋아라 하고 있을 때 넷째 형님의 전화가 걸려왔다.
“너희들 가고 나서 엄마, 아버지가 많이 다투셨어. 날도 추운데 며느리 힘든데 주방에 보일러도 안 틀어줬다고 아버지한테 막 화를 내셨대. 네가 발 비비고 서서 일하는 모습 보니 깐 엄마 마음이 많이 아프셨나 봐. 너한테 미안하다고 가지고 계셨던 쌈짓돈 전부 넣어서 가방 밑에 뒀다는데 봤니? 네가 전화도 없어서 엄마가 걱정이 되셨나 봐.”
그때 알았다. 어머님의 마음을.
하나뿐인 며느리 아껴주고 보호해주고 싶은데 그렇게 하질 못해서 속상하고 미안했을 그 마음을. 그날 나는 돈보다 더 귀한 어머님의 마음을 받았다. 철없는 외며느리는 그것도 모르고 나만 일 시키고 나만 늘 참아야 하는 시댁에서의 상황들이 싫기만 했으니 그 마음을 헤아려드리지 못해서 죄송스러웠다. 평생 일만 하시고 경제권을 갖지 못했을 어머님에게 30만 원은 큰돈이 분명했다. 그것을 며느리 모르게 가방 속 깊숙한 곳에 질러 넣으셨을 어머님 마음을 알고부터 나는 시골집에 다녀오는 것에 투정을 부리지 않았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시골집이 감사했다. 도시에서는 채워줄 수 없는 호기심을 시골집에 내려가면 해결할 수가 있었다. 가마솥과 아궁이, 뒤뜰의 감나무, 집 앞의 개울, 소들의 울음소리, 지저귀는 새소리까지 불편함만 참으면 모든 것이 신기한 호기심 천국인 시골은 우리 아이들의 귀한 정서적 자양분이 되어 주었다.
지금은 두 분 모두 하늘나라에 계신다.
“어머님, 아버님. 저희들 너무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요. 불편했지만 어머님, 아버님 계시던 시골집이 가끔은 그리워요. 귀한 손주들도 이제는 청년이 되었답니다. 저희 앞으로도 서로 사랑하며 잘 살게요. 어머님! 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