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8일 금요일
D-15,632
지금은 새벽 2시 39분.
1.
저녁에 삼겹살을 구워서 지오도 좀 먹이고 나랑 소영이도 열심히 먹었는데, 최근에 고기라고는 찌거나 삶은 것들만 먹어왔던 차에 오랜만에 구운 고기를 먹으니 술이 너무나 땡겼다. 집에 있는 술은 선물 받은 뒤로 아까워서 아직 개봉 전인 로얄 살루트 한 병, 일주일쯤 전에 꿔바로우 먹으면서 같이 마시다가 남은 공부가주 반 병, 진로소주 한 병, 그리고 역시나 마시다가 스토퍼로 뚜껑을 막아놓은 이마트 트레이더스에서 산 와인 반 병이 전부였다.
술을 줄이자고 애써 마음까지 먹었는데(끊을 수 없는 걸 알기에 끊자는 다짐을 애초에 하지 않는다) 도수가 높은 술은 왠지 피하고 싶었다. 간단하게 맥주나 한 캔 있었으면 딱 인데 요즘엔 맥주도 쟁여놓지 않는다. 입가심이나 할 겸 와인을 꺼내서 몇 모금 마시니 몸이 찌르르 한 게 이내 노곤노곤한 상태가 되어 버렸다. 요 며칠(아마도 사흘쯤?) 문자 그대로 집밖에 나서질 않아서 – 심지어 음식물 쓰레기 버리러 나갈 일도 없었다 – 이번 주가 얼마나 추운지 감이 없었다. 지오 눈 구경 시켜 주겠다고 아무 생각 없이 해맑게 지오를 꽁꽁 싸매고 눈을 밟으러 나갔다가 정말이지 얼어 죽을 뻔했다. 얼마나 추운지 마스크와 코사이로 비집고 나온 입김이 눈썹에서 얼어버렸는데 눈썹에 고드름이 생긴 건 군생활 이후 처음이다.
추위에 떨고 난 뒤에 와인 반 병까지 마셔서 그런지 저녁 8시 반쯤에 지오 재우러 침대 들어가서 눕자마자 바로 곯아떨어져 버렸다. 그런데 너무너무너무 피곤한데도 새벽 12시에 눈이 번쩍 떠져 버렸다. 다시 자려고 해도 잠이 이미 달아나버려서 1시까지 멀뚱멀뚱 누워있다가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켜서 거실로 나왔다.
2.
일단 커피 한 잔 타고.
커피 홀짝이면서 머리도 깨울 겸 글이나 몇 자 읽자 싶어서 지오 놀이방(원래는 내 서재였던)에 들어가서 책장을 가만히 들여봤다. 읽을 게 뭐가 있나 둘러보는데, 3년 전쯤 지금 사는 집에 이사하고 나서도 책장을 서너번 옮긴 터라 책장이 정말이지 뒤죽박죽이다.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분류해 뒀었는데 이젠 어느 정도 포기 상태가 됐달까. 그럼에도 여전히 정리된 부분이 있는데 그건 바로 소설 쪽. 10년 전쯤에 박민규를 읽은 걸 시작으로 책에 취미를 붙이게 돼서 그런지 소설쪽은 애틋함이 좀 남다르다. 그래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반듯하게 정리정돈 해놨나 보다.
책장 제일 왼쪽 상단 모서리에 박민규를 시작으로 천명관, 편혜영, 황현진, 구병모, 김연수, 김중혁, 정유정, 장강명, 김애란 등의 젊고 촉망 받던 한국작가들이 네 칸에 걸쳐서 쭉 줄 서 있고(특히나 황현진 작가는 내가 당시에 근무했던 N사에 사보작가로 잠깐 활약했었는데 단행본이 아니라 사보에서 만나니 어찌나 반가웠던지),
그 아래로 오쿠다 히데오(극우주의 성향 때문에 나중엔 손절했지만 카피라이터 출신이라 나름 애정이 깊었던), 다자이 오사무, 미야모토 테루,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류, 에쿠니 가오리, 히가시노 게이고, 가네시로 가즈키(제주 출신 재일작가인데 제주도에서 태어난 대학 동기생 한 명이 자기네 외삼촌이라고 해서 몇 번이고 진짜냐고 되물었던 기억이 있다) 등이 자리 잡았다.
그리고 옆 책장으로 넘어가면서 슬슬 카오스가 시작되는데 니코스 카잔차키스, 서머싯 몸, 스티븐킹, 밀란 쿤데라, 더글라스 케네디, 필립 로스, 코맥 맥카시,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루쉰, 움베르토 에코, 살만 루슈디, 이언 매큐언 등이 나라와 세부 분류 없이 마구잡이로 들어 앉아 있다. 그럼에도 대부분 소설 분류라 마음 먹으면 어렵지 않게 정리해 내리란 생각인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분류에 애를 먹는 논픽션들.
2012~13년쯤에 한겨례교육문화센터에서 강의를 몇 개 들었는데 어느 강사분이 다치바나 다카시를 추천해 줬었다. 입에 거품을 물고 극찬을 하길래 ‘저 정도까지?’라고 반신반의하면서 서점에 가서 책을 한 권 샀다. 읽고 나서는 두둥. 충격이었다. 다치바나 다카시를 겪은 이후로는 의식적으로 논픽션들을 접하게 됐고, 그렇게 2013년도 전후로 소설만 편애하던 내 독서 체질도 180도 바뀌었다.
3.
간단하게 책정리 순서를 머리에 그릴 겸 쓰기 시작한 글이 너무 두서 없이 길어졌다. 책 이야기는 나중에 천천히 정리하기로 하자. 오늘부터 소영이도 새벽 기상 무브먼트에 동참하기로 했다. 3시 반에 깨워주기로 했는데 시계를 보니 벌써 3시 40분이 넘었다. 어여 깨우러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