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9일 토요일의
지오 이야기
살다 보니 몇몇 사람에게 울림을 받고 종국에는 그 사람을 응원하게 되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그렇게 되었던 적을 곰곰이 돌이켜 보면 그 사람이 나에게 ‘감동’이라는 감정을 선사했던 경우가 대다수 였다.
감동이라는 불씨를 일으키는 가장 효과적 부싯돌은 바로 '진심'아닐까 싶다. 진심이란 나의 마음가짐, 몸가짐을 꾸밈 없이 상대에게 드러내는 일인 거니 이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표면적으로는 법과 공동체라는 안전망 아래서 살아가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 사회에는 자기를 잡아 먹으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사람들이 수두룩하게 차고 넘치다 보니 진심을 보인다는 건 어쩌면 전쟁터에서 무장해제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일지 모른다 – 얼마 전 인터넷에서 본 이야기가 생각난다. 일본인 이야기였는데 아버지가 아들의 젓가락질을 지적하며 한다는 말이 “나는 네가 밥을 어떻게 먹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회에 나가면 네 젓가락질 하나만 가지고도 너를 공격하려는 놈들이 수십 수백명이다. 그런 놈들에게 틈을 보이지 마라” 였다고 한다.
꽤나 방어적이고 자기 안위적인 나의(라고 하지만 대다수가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자세 덕분에 나도 누군가에게 진심이란 걸 좀처럼 내비치지 않는데, 그런 탓에 사람들과의 관계를 대체로 세련되고 능숙하게 처리한다고 자부하고 있음에도, 과연 이 사람들이 나의 행동에서 진심을 발견하고 감동을 받을까라는 물음에 그렇다고 선뜻 대답할 자신은 없다.
그런 탓에 오늘 지오가 나에게 보여준 행동이, 더욱 내 마음을 크게 울린 듯하다.
포에버북스라는 출판사에서 엮은 ‘우리 아이 첫 그림책 똘망똘망’이라는 시리즈가 있는데 – 와이프 오빠네랑 우리 형네 두 집에서 똑같은 책을 물려 받은 걸로 봐서 돌 지난 아기들 사이에서 꽤나 유명한 책인 듯하다 – 13권의 책 제목이 “올리볼리 할머니”다. 책은 ‘뾰족뽀족 산에 사는 마법사 할머니가 요술지팡이를 타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올리볼리 올리리하고 주문을 외워 동그라미, 세모, 네모를 모아 우주선을 만들고 사람들을 우주선에 태워 우주 구경을 시켜준다’는 뭐 그런 줄거리의 동화책이다.
이 책의 세 번 째 장인가 네 번째 장을 보면 할머니가 마을에서 “네모 모여라 얍”하고 주문을 왼다. 그러면 네모난 창문이 하늘로 날아가려고 하고 어떤 콧수염 난 아저씨가 창문을 장난스럽게 부여잡고 약간은 엉엉 우는 모습을 하고 있다. 맥락상 엉엉 우는 모습이다 뿐이지 아기들이 보는 동화책이다 보니 당연히 삽화도 태생적으로 귀엽고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오가 그 장면을 보더니 글쎄! 창문을 부여잡고 있는 콧수염 아저씨에게 슬금슬금 다가가서 고개를 숙이더니, 입으로 아저씨를 “호~호~” 불어주고 이내 손목을 까딱까닥하며 또 입으로 “또닥또닥” 하는 게 아닌가.
무결점의 순수함, 아무 계산 없는 진심.
나도 모르게 지오를 꼭 껴안아 주면서 고맙다, 고맙다, 고맙다라고 지오 귀에다가 이야기했다.
‘코딱지만한 게 뭘 안다고 이러지’ 싶으면서도 가슴 한 구석에서 시작된 작은 파장이 온몸으로 삽시간에 퍼져나가는 걸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 이건 아직 채 2년도 살아내지 못한 어린 아기만 지닐 수 있는 능력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지오를 앉혀놓고 올리볼리 할머니를 마저 읽어주고 블록 놀이도 하고 숨바꼭질도 했다. 그러고 나선 또 혼자 신나서 두 팔을 흔들면서 매트 위를 빙빙 돌았다. 혼자서 신나게 돌고 넘어지고 또 돌고 하는 지오를 보면서 생각했다. ‘너도 언젠가는 자라서 아빠와 비슷한 생각과 자세로 세상을 살아갈지도 모르겠지만 지오 너한테 이토록 순수하고 맑은 시기가 있었다는 걸 잊지 말고, 또 오늘 아빠한테 꺼내 보여줬던 '진심'이 네 마음 속에 여전히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는지 살아가면서 왕왕 한 번씩 보살피고 지켜봐 주면 좋겠다’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