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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읕 Jan 12. 2021

GIO STORY #3

2021년 1월 11일 월요일의

지오 이야기


요 며칠이 몇 십 년 만에 들이닥친 최악의 한파란다.

그런데 요즘 지오의 언어상태는 그야말로 봄날의 한 가운데에 있다. 


입을 열어봤자 고작 엄마, 아빠, 빠빠, 무께(제주도 아쿠아플라넷에서 사준 하프물범 인형. 지오는 얘가 물개인줄 알고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베스트 프렌드라는 점이다) 정도만 말할 줄 알았던 게 불과 일 이주 전인데, 이제는 "아빠가(뭐가 됐든 아빠가 대신 하라는 뜻이다), 아빠 삐(하지 말라는 뜻이다), 아빠꿋(좋다는 뜻이다)"처럼 본인 욕구에 맞춰서 표현을 취사선택한다든지 "안뇽 잘자, 안뇨옹하시어, 친구 토닥토닥" 등 관계를 맺는 말도 곧잘 해낸다. 말이 꽃처럼 만개하고 있다.   


지오를 가만히 지켜보면서 “지오 너 있잖아. 한 일 이주 전만해도 외계어 옹알옹알하는 게 고작이었는데 왜 이렇게 말이 늘은 건데? 되게 신기하네.”라고 혼잣말을 중얼중얼하면, 소영이는 그런 나를 보면서 “이제 돌이킬 수 없는 팔불출이 되어가고 있구나.”라고 위로와 격려의 말을 전하곤 한다.


그런데 문제는 - 지난 주말부터 인듯한데 - 이제 지오가 바야흐로 “아니야”의 시절에 돌입했다는 거다. 주말에 진관사에 들러서 스님이 장갑을 선물로 줄때도 “아니! 아니!”하고 소리치더니 (지난 주말에 있었던 진관사 사건은 여기에서 확인 https://brunch.co.kr/@yrots/52) 이제 무슨 말만 해도 아냐, 아니야를 반복해대는 거다. 


잘 잤어? / 아니!

기저귀 갈자 / 아니야!

기저귀 갈고 밥 먹어야지? / 아니아니 

배도 안고파? / 아니아니야

너는 아니야 밖에 모르냐? / 아니!


며칠 관찰해본 결과 진짜 싫어서 아니라고 하는 경우도 있었고, 말만 아니야라고 하고 순순히 기저귀 갈라고 엉덩이도 내밀고 옷 잘 벗고 얌전히 샤워하러 따라 들어오기도 했다. 그러니까 맥락에 맞게 쓰는 경우도 있고 그냥 입버릇처럼 재미로 하는 경우도 있었던 거다. 


그런데 나도 사람인지라 하루 온종일 아니야 아니야를 듣고 있노라면, ‘내가 당장 네놈 말버릇을 고쳐주마.’라는 생각이 온 전두엽을 가득 채우곤 한다. 그래서 그러지 말라고 몇 번 얘기하기도 했다. 


지오야, 아니라고 하면 안되지? / 아니!

아니 말고 맞아요! / 아니야

맞아맞아! / 아니아니야!

맞다니까! / 아냐아아!


역시 실패. 

내가 남들이랑 대화하면서 나도 모르게 아니라는 말을 자주 했나 돌이켜 보기도 하고, 어떻게 하면 지오가 아니라는 말 대신 네 또는 맞아라는 말을 쓰게 만들까 며칠간 고민을 하기도 했다. 소영이랑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야기를 나눠 볼까 싶기도 했는데 그 과정에서 갑자기 문득 깨달은 한 가지.


아니, 내가 왜 아니 대신에 굳이 맞아를 강요하고 있는 걸까?


내가 왜 이러나 싶었다. 벌써부터 지오를 내 잣대 안에서 판단하고 키우려고 하고 있구나하고 뜨끔했다. 지오는 기초적인 단계에서 자기 감정도, 의사 표현도 줄기차게 학습해 나가는 단계고 그 와중에 요즘 열심히 배우는 표현이 ‘아니’일텐데 나는 벌써부터 '예의없음'이라는 기성의 틀에서 지오를 바라보고 교정하려고 했던 거 같다. 


나아가서 든 생각이, 나는 원만하고 둥글둥글하게 사는 게 최선이라는 가르침을 받들어 삼십 몇 년을 살아오다 보니 거절도 쉽게 못하고 설사 옳은 말을 해야 하는 상황에도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진 않을까 바른 소리를 제대로 못하곤 하는데 이런 모습을 내가 적잖이 싫어한다는 거다. 자기애가 강한 나로서도 이런 내 모습은 솔직히 고치고 싶은 때가 많다. 그런데 스스로 싫어하는 모습을 지오한테 강요하는 꼴이 되어 버린 것 같기도 했다. 2차로 뜨끔.


사람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했던가. 물이 반밖에 안 남은 게 아니라 반이나 남았네로 생각을 바꾸자 지오가 수도 없이 반복하는 “아니, 아니”가 기껍게 감사했다. 


아니! / 그렇구나, 지오가 기저귀 갈기 싫구나

아냐아냐 / 그래, 지금은 배가 안 고프구나

아니야 / 옷 갈아 입기가 귀찮은가 보구나


지오와 나누는 “아니” 대화가 이렇게 즐겁고 행복한 일이었던 것을 왜 몰랐던 걸까.

분명 앞으로 살아가면서 지오가 수십만 번의 아니를 나에게 시전할 거다. 그럼에도 변함 없이 지오의 ‘아니’를 제대로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지오의 ‘아니’를 열렬히 응원해 주자,라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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