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를 넘나드는 종로 3가의 매력은 무엇?
세대를 넘나드는 곳. 서울 종로 3가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방문객과 삶의 스토리가 살아 숨 쉬는 곳. 서울. 종로구다.
매일 30만 명의 방문객이 찾는 대한민국 최고의 관광지.
매월 천만명. 일 년이면 1억 2천만이 찾는 곳. 으악~
종로구는 서울 한복판에 있어 예로부터 정치, 경제, 상업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북촌 한옥마을, 서촌 세종마을, 인사동을 비롯해 관내에 유명 관광지가 많고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비원, 종묘 등 조선 역사의 대표 상징 유적이 많이 있다. 광화문, 종로 일대를 아우르는 역동적인 도심 상권은 일 년 내내 인파가 몰리며 다이내믹, 그 자체 흡사 대한민국의 축소판이다.
종로구내 중심. 종로 3가는 신, 구세 대간의 소통과 공유가 기대되는 곳이 다.
오랜 전통의 거리인 만큼 더욱 유별나다고 할까.
종로 3가에는 2030, 4050, 6070이 같이 논다~
요즘은 세대를 넘나들며 2030, 4050, 6070이 함께 모여들고 스치듯 지나가며 마주 할 때도 있다.
이 무슨 얘기인고.
이 일대에는 주로 낮에는 노년층이, 오후 늦게는 중년층이, 저녁과 주말에는 신세대들이 함께 거리를 가득 메운다. 남대문, 동대문시장처럼 대형마켓도 아니고 서울역, 고속버스터미널처럼 교통 중심지도 아닌데, 서울시내에서 이렇듯 전 연령층이 고루 찾고, 만나고 소통하며 즐기는 곳이 또 있을까 싶다.
낙원상가, 피카디리, 단성사... 종로 3가의 추억
지난 80~90년대 낙원상가 일대에는 각종 악기상들이 모여 있어 POP 음악과 기타, 보컬밴드로 상징되는 청춘의 거리, 음악과 낭만이 흐르는 감성의 명소였다. 종로 3가 1호선 출구 주변에는 멀티플렉스가 없던 단관극장 시절. 대한민국 최고 극장인 피가디리, 단성사, 서울극장이 자리해 명동과 함께 서울 최고의 핫플레이스로 명성을 날렸다. 이 시기를 거친 이들이 바로 7080 학번, 나이로 치면 오늘날 4050 세대가 주역들이다. 종로3가역 뒷골목인 피맛골은 선술집과 학사주점이 즐비하여 늘 떠들썩하지만 신명 나는 거리였다.
2000년대 이후 젊은 층이 신흥 상업지역으로 떠오른 압구정, 강남, 홍대 등으로 대거 떠나면서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종로 3가 이 곳은 어르신들이 대신 그 빈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나이 지긋한 노년세대들이 탑골공원과 종로 3가 일대 곳곳에 그들만의 아지트를 구축하고 사랑방 역할을 하는 지역으로 자리 잡아왔다.
락희(樂喜) 거리 / 송해길 = 어르신 거리
지난해에는 종로 3가 낙원상가에서 약 1.2km에 이르는 곳을 어르신 거리 일명 락희(樂喜) 거리도 조성되었는데 종로구청에서 ‘노인들의 천국’이라 불리는 일본 도쿄의 스가모 거리를 벤치마킹하여 실버관광구역으로 발전시키기 위함이다. 이 곳은 국민스타. 송해의 이름을 따서 송해 길이라고도 한다. (송해 선생은 지금도 자주 이곳 단골 해장국집에서 식사도 하고, 동네 목욕탕에서 반신욕을 즐긴다는)
이발료 3천 원, 해장국 한 그릇 2천 원, 근사한 백반 한 끼도 고작 4천 원 수준의 저렴하고 인심 좋은 가게들이 많아 노년층의 가벼운 주머니 사정을 해결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그런 연유로 주로 낮시간에는 5070들의 발길이 잦다. 덤으로 3040도 가성비를 내세워 종종 이 곳을 애용한다.
근데 최근 들어 조금 낯선 이들이 동네에 몰려오기 시작했다.
3~4년 전부터 홍대 연남동, 이태원 경리단길 못지않은 세련된 트렌드 문화가 이 곳에 정착하여 종로 3가 일대는 이제 세대를 넘어 중장년층과 노년층, 신세대층이 함께 찾는 핫플레이스 구역이 되고 있다.
이는 락희 거리의 맞은편에 있던 그저 평범한 작은 옛 마을. 익선동이 갑자기 뜨면서부터 시작된 현상이다. 익선동 한옥마을은 하루아침에 종로 3가 방문객의 평균 연령 치를 확~ 낮춰 놓았다. 평일 오후, 주말에 종로 3가 전철역 4~6번 출구는 다양한 연령층의 행인들이 자연스럽게 섞여 오간다.
낙원상가 부근 종로3가역 4번 출구에서 5분 거리에 위치한 익선동은 올해 4월. 서울의 마지막 한옥 보존지구로 지정된 100여 채 규모의 작은 한옥마을을 지칭한다.
종로 3가의 세대 풍경을 바꾼 익선동 한옥마을
역사적으로 일제시대 ‘조선의 건축왕’이라 불린 독립운동가 정세권 선생(1888~1965)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가 없는 상징적 마을이다. 선생은 1920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부동산 개발회사인 ‘건양사’를 설립. 서울의 북촌, 서촌, 삼청동, 계동, 가회동, 익선동등에 대규모 토지를 매입, 저렴한 비용으로 중소 규모의 한옥을 대거 지어 서민에게 값싸게 분양하였다. 왜 서울 강북, 그것도 종로구 일대에 예전부터 오랜 한옥마을이 있었을까. 그저 서울의 옛 마을이겠거니 했다.
지금 전국에 널려있는 아파트 단지처럼 대단위로 조성된 한옥마을은 일제 강점기 남촌부터 터를 잡기 시작한 일본인들이 몰려오는 시기에 조선인들의 주거공간을 지켜낸 대단한 건축역사였다. 정세권 선생은 현대시대로 보면 조선의 ‘디벨로퍼’였던 셈이다. 한옥 건축으로 모은 자금을 대부분 독립운동자금으로 지원하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되기까지도 했다. 독립운동의 정신이 숨 쉬는 이 작은 마을이 현재까지 남아 신세대가 찾는 명소가 되다니 참 신기하다.
매주 주말 오후 익선동 풍광. 좁디좁은 익선동 골목에 청춘 남녀들이 줄지어 몰려든다. 성인 2~3명이 나란히 걷기도 힘든 좁은 길이 오가는 행인에 미어터질 지경이다. 이 곳에는 이미 SNS로 명성이 자자한 카페와 독특한 콘셉트와 메뉴로 유명한 맛집, 재치 있는 아이디어 공예품 점등이 입점해 있다.
평범한 익선동 골목의 분위기를 바꾼 것은 낡고 오래된 마을에 신세대 여성 둘이 한옥을 개조해 ‘익선다다’ 라는 다방을 연 것이 계기였다. 처음에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차츰 입소문이 알려지며 유명해지기 시작했고 이를 이어 트렌디하고 재치 넘치는 다양한 점포들이 연이어 들어서며 지금 모습의 핫플레이스. 익선동이 되었다.
트렌드세터들의 매력지(地)
당연히 트렌디세터(유행에 민감한)들이 결코 지나칠 수 없다. 그들이 한 번쯤 다녀가면서 입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각종 미디어 매체와 인터넷, SNS 채널에 소개되면서 익선동 한옥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100여 채도 안 되는 한옥은 매물이 품귀되어 최근에는 10평 가게 권리금이 억대로 치솟았다고 한다. 다른 여타 뜨는 동네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인 젠트리피케이션도 어쩔 수 없이 원주민 상당수가 떠나고 있다. 수요는 넘치고 공급은 한정적인 현 상황으로 볼 때 익선동의 부동산 가격은 당분간 날개를 달 것이다.
지난 5월 말에는 한국인들에겐 아직 낯선 축제. 퀴어축제(동성애 모임) 야간개장 행사도 열렸다고 하니 가히 파격적이다.
어르신, 같이 고기 한판(?) = 돈의동 고기 골목
익선동 바로 옆에는 돈의동 갈매기 골목이 또 먹자골목으로 유명한데, 실버세대의 락희 거리 어르신들과 익선동 골목의 신세대들이 우연히 한 구역 내 식당에서 한바탕 고기 잔치를 할 수 있다. 물론 합석까지는 아니더라도 맛난 고기 앞에서 굳이 세대 간 구분할 필요는 없다. 여기서는 어르신이나 신세대나 같은 값을 치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