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엑시트'를 보니
오랜만에 제작된 한국産 재난영화 ‘엑시트’는 올해 기대 이상 대박을 쳤다. 아마 출연 주, 조연 배우진은 물론 제작진, 투자자조차도 이 정도 흥행 성공을 예상하진 못했을 것이다. 이미 ‘900’만 고부 능선을 단숨에 넘고 곧 꿈에 그리던 ‘1,000만’ 고지가 바로 코 앞이다.
평범한 도시, 우리의 전형적인 가족(3세대)의 칠순(70) 생일잔칫날 도시는 아무런 이유도 모르고 가스 테러 사건에 휩싸이고 모든 이들의 생명줄은 꼭대기, 옥상을 향한다. 취업 대기자이자 현재 밉상 백수. 용남(조정석)이 가장 잘하는 달란트(특기)는 이 한마디 영화 대사면 충분하다.
‘하필 산악 동아리가 뭐냐?’라 핀잔하는 누이.
이 영화의 최고 액션 로망은 더 높게, 또 높게, 오르는 일이다. 그러다 보니 죽음의 사투 끝에 당도하게 되는 곳은 제일 꼭대기, 옥상이다. ‘근데 이 놈의 동네 옥상은 왜 다 잠겨있어?’
영화 속 지나가는 한마디 대사이지만 별 쓸모없는 공간, 옥상의 위상을 말해주기도 한다.
많은 세월 동안 무시받고 핀잔받던, 관심 외곽으로 대우받던 공간을 대하는 대접이 이제 많이 달라졌다. 때론 건물 옥상일 수도, 그 옆 한 칸 옥탑 방일수도.
서민의 대명사. 옥탑방에서 럭셔리 루프탑(Roof-top)으로.
과거 옥탑방은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운 N포 세대, 자취생, 가난한 청춘의 전유물이었다. 영화, 드라마의 단골 배경 공간으로 등장하고 삶의 애환과 추억이 담겨있었지만 옥상의 무한 변신은 어디까지. 이제는 럭셔리 라이프로 진화 중이다. 옥탑방에서 루프탑, 이젠 도시의 새로운 공간으로 각광받고 있다.
#. 옥탑방에서 여름 나기
여름이 오면 도시는 연일 폭염과 열대야(夜)에 시달려야 한다. 장마기간 중엔 그나마 구름 잔뜩 낀 날씨와 소낙비가 자주 내려 도시의 여름을 식혀주곤 한다. 올여름은 사상 최고의 무더위로 기록된 2018년 작년에 비하면 선선한 양반 날씨라 해도 무방하겠다.
요즘 신세대들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에어컨이 정말 귀하던 시절(부자가 아닌 이상)이 있었는데 당시 도시에서 즐기는 여름 최고의 피서지는? 은행이었다. 딱히 볼 일이 없지만 으레 오가다 굳이 은행에 들어가 한 10여분 서늘한 공기로 마사지하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또 나선다. 더 오래 있으면 은행 청경이 눈치 준다. 이 장면에 공감하면? 나이 좀 드셨다는 얘기.
대부분의 학생, 직장인이라면 낮에는 학교, 사무실이나 공공기관, 대형 쇼핑몰 등으로 꼭꼭 숨어 더위를 피해 갈 수 있다지만 야간에도 식을 줄 모르는 도시의 열기는 더욱 참기 힘들다. 우리네 아파트는 한 여름밤에도 대부분 문을 꽁꽁 닫고 에어컨 바람에 의지해 열대야를 넘겨야 한다.
이럴 땐 옥상 마당 편상 마루가 있는 달동네 집들이 부럽기만 하다. 밤이 오면 온 식구가 옥상텃밭 옆 편상에 모여 삼겹살 파티나 시원한 수박화채를 먹으며 살살 불어오는 실바람을 벗 삼고. 내려다보이는 아랫마을 풍광과 그 속에 담긴 사람내음 감상은 덤이다. 팍팍한 서민의 삶이지만 정겨운 그림이 아닐 수 없다.
작년 여름에는 서울시장 부부가 삼양동 달동네 옥탑방에서 에어컨 없이 1개월간 거주하는 모험(?)을 강행했다. 작년 서울은 그야말로 기록적인 찜통이었다. 서민 코스프레, 보여주기 이벤트라는 비아냥이 있었지만 그래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 달 동안 9평짜리 옥탑방 체험은 쉽지 않은 도전이었을 것이다.
옥탑방은 태생적으로 최소한의 건축비용으로 지어져 대부분 단열, 보온재 등이 미흡한 공간이다. 그야말로 오싹한 추위의 겨울에는 냉장고요 펄펄 끊은 여름에는 사우나나 다름없는 곳이다. 높다란 위치에서 강변이나 아랫마을, 저 멀리 풍광을 조망하는 것이 그나마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요즘엔 집주인들이 주거 환경을 개선하려고 그나마 애쓰고 있지만 그래도 폭염으로 데워진 그 열기를 어찌 감당하랴?
#. 드라마, 영화의 단골 배경장소, 옥탑방
가난한 서민과 청춘의 삶을 표현하는 대명사, 옥탑방은 드라마, 영화의 단골 소재로 지금도 자주 등장한다. 흔히 선악(善惡)과 빈부(貧富)가 대립되는 이야기 구조에서 주인공은 대부분 옥탑방에 거주하는 가난하고 약한 자이지만 로맨티시스트로 그려지곤 한다. 삶이 고된 청춘들이 사는 옥탑방이지만 로맨스와 낭만이 꽃 피어나듯, 싱그런 열매가 무르익는 아름다운 공간으로 묘사된다.
초대박 드라마 ‘도깨비’에서 당당하고 씩씩한 써니(유인나)의 집은 작은 옥탑방이었다. 300년의 시간을 뚫고 21세기 서울로 내려온 왕세자와 전생의 여인과의 사랑이야기를 그린 다소 황당한 이 드라마의 네이밍은 ‘옥탑방 왕세자’ (박유천, 한지민)였다.
극장 흥행에도 성공한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김수현), ‘티끌모아 로맨스’(한예슬, 송중기), ‘완득이’(김윤석, 유아인), ‘럭키’(유해진)에서 주인공들은 사정은 다르지만 모두 옥탑방에 사는 이들이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유명한 작품은 2003년 드라마로 제작, 한때 ‘옥고 폐인’이라는 마니아층을 만들어내며 당시 최고의 인기 드라마로 등극한 ‘옥탑방 고양이’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유명을 달리한 故정다빈과 김래원이 열연하여 국민적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옥탑방 고양이’는 이미 대학로 연극으로도 성공한 작품이라 드라마의 성공과 함께 장기 공연까지 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지금도 인기 예능프로인 ‘나 혼자 산다’는 한때 밴드 ‘장미여관’의 리더, 육중완의 망원동 옥탑방 자취생활이 생생히 공개되어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소박하고 풋풋한 젊은 음악가의 정감 가는 일상은 망원동 동네 주민들을 한때 팬으로 만들었다. 방송프로의 인기 덕에 가수 육중완은 ‘옥탑방’이란 곡(曲)을 만들어 발표도 했다.
반지하방, 옥탑방, 고시원,,, N포 세대의 상징 ‘반. 옥. 고’
씁쓸한 얘기지만, 심각한 청년실업과 경기불황으로 88만 원 세대, 20대가 거주하는 공간 ‘반옥고’ (반지하, 옥탑방, 고시원)란 풍자어가 등장했었다.
그중 옥탑방이 제일 처지가 낳은 상류급으로 쳐준다. 왜 나면?
아침 상쾌한 공기를 마시고, 새파란 하늘을 보고, 따스한 햇볕을 쬐고, 밤하늘 별을 헤아릴 수 있는. (다만 여름에는 사정이 바뀐다. 한 여름 옥탑방은 생지옥일 수도)
옥상 편상(마루)에서 낮잠을 즐기고 가볍게 운동으로 몸도 풀고, 저녁에는 친구들과 소박한 막걸리 파티, 가슴이 답답할 땐 멀리 시원한 풍경을 바라보며 삶을 달래고, 별빛 달빛이 아름답게 펼쳐진 밤엔 내일의 소망을 꿈꾸는. 옥탑방과 옥상은 이야기가 샘솟는 열린 공간이었다. 예전 대학시절 옥탑방에서 자취하던 친구 집은 당시 최고의 방문지이자 청춘들의 아지트이기도 했다.
추억 속의 옥탑방은 삶의 애환이 녹아있는 아득한 곳이었지만 요즘에는 옥상과 옥탑방의 위상이 180도 달라졌다.
#. 루프탑(rooftop). 전성(全成) 시대!
이젠 옥상이라는 단어보다 루프탑(Rooftop)으로 최고의 트렌드 핫플레이스, 낭만 공간으로 떠올랐다. 위상의 변화를 넘어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과거 1층이나 저층에 비해 비교도 안될 만큼 값싼 임대료가 이젠 옥상이 더 비싼 곳이 많아졌다.
서울에는 경관 조망 동네로 알려진 곳이 많이 있다. 서울 시내 야경을 감상할 수 있는 삼청동, 성북동, 혜화동, 부암동과 한강 조망도 가능한 한남동, 해방촌, 후암동, 이태원 등이 대표적이다. 공통적으로 뜨는 루프탑 조망 동네는 거의 다 옛날 서민의 주거촌인 달동네이다. 경리단, 한남동등에 있는 소문난 루프탑 바(Bar)와 루프탑 레스토랑 등은 평일에도 가득할 정도로 젊은 연인들의 데이트 로망 장소가 됐다.
루프탑의 인기 상승에 따라 당연히 근사한 옥상을 가진 건물의 가치는 올라가게 마련. 이제 저마다 괜찮은 옥상 자리를 찾으려고 경쟁이다. 심지어 상가빌딩도 옥상을 이용할 수 있는 ‘꼭대기층’ 상가가 더 인기이다.
옥상을 활용한 루프탑 캠핑장과 글램핑장도 생겨났다. 주말에 차 막히며 멀리 가는 고생을 하지 않고 도심에서 캠핑을 한다. 매일 보는 익숙한 동네이더라도 옥상 한 공간에 꾸민 텐트와 그램핑 시설이 그럴싸하다. 고기 굽는 냄새가 온 동네에 풍겨 민폐일 수도 있지만, 연인과 친구끼리 둘러앉아 바비큐를 즐긴다. 루프탑으로 변신한 옥상 공간이 독특한 감성을 품어낸다.
옥상의 루프탑이 주목받는 이유는 이색 공간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진 영향이 크게 작용한다. 1층 상가의 경우 거리를 오가는 행인의 시선이나 먼지, 소음 등의 불편이 발생할 수도 있지만 루프톱은 이런 걱정 없이 오히려 탁 트인 풍광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 열풍적으로 생겨나는 루프탑, 테라스 카페, 루프탑 시설 등은 상당수가 불법(不法)이지만 이 열풍의 힘을 단속이라는 행정력이 막기는 어려워 보인다. 워낙 많은 곳곳에 루프탑을 설치해 규제도 어렵지만 벌금보다 장사 이익이 훨씬 크니 배짱부릴만하다.
루프탑 열풍은 이제 복잡한 도심 한복판 곳곳에 파고들기 시작했다. 서울 도심의 대형 백화점과 특급 호텔의 옥상에는 어김없이 옥상을 활용한 럭셔리한 서비스 공간이 들어섰다. 예전 에는 볼품없는 대형 철제 물탱크와 환풍기, 텅 빈 공간이 대부분이었던 빌딩 옥상도 탈바꿈했다. 자고 나면 생기는 곳이 고급 루프탑 레스토랑, 루프탑 칵테일 바(Bar), 루프탑 라운지이다. 호텔과 백화점도 재빠르게 옥상 마케팅 열풍에 동참했다. 트렌디쉬한 고객을 끌기 위해 백화점 옥상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옥상 파티, 옥상 영화제, 루프탑 토크콘서트, 루프탑 가든파티... 종류도 가지가지다. 어린이 동반 가족을 위해 옥상에 놀이터, 캐릭터 공원도 꾸몄다. 풋살 파크 등 스포츠 테마시설도 들어섰다
메마른 현대 생활에서 옥상이라는 공간이 주는 인간애와 정서는 매우 크고 활용하면 할수록 소중한 가치로 되돌아온다. 이제 옥상은 도시 속 낭만과 힐링, 치유의 공간으로 각광받고 있다. 하늘과 맞닿은 이 곳에서 사람들은 한껏 자유를 느끼고 즐긴다.
하지만 이제 곧 옥탑방이라는 공간이 현실 세계에서 점차 사라지고 영화, 드라마에서 보여준 풋풋한 옥탑방 청춘 로맨스 이야기도 곧 품귀될지도 모르겠다는 아쉬운 생각이 든다. 화려하게 꾸민 루프탑이 작품의 주요 배경이 될 수도 있겠다.
예전의 ‘옥탑방 로맨스’가 더 멋지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