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늘 바쁘다. 오가는 사람도 많고 차들도 많다. 늘 분주히 움직이며 저마다의 길을 간다. 마치 화난 것처럼 웃음기 없는 냉담하고 시무룩한 도시인의 얼굴은 우리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그래도 도시가 늘 그런 것만은 아니다, 단지 그 모습을 못 보고 그 정감을 못 느끼고 지나칠 뿐.
대학시절 학생기자, 광고동아리 활동을 한 탓에 자연적으로 글과 가까웠고 오랜 광고회사 생활로 평소 신기한 문구, 독특한 카피에 항상 눈이 갔다. 직업은 못 속인다고 평소 길을 걷거나 버스를 타거나 지하철을 탈 때 사람보다는 다양한 글과 그림에 먼저 눈길이 가는 습관이 있다.
길 위에서 마주치는 평범하든 특이하든 다양한 글귀를 읽고 간판, 광고 포스터, 심지어 정당에서 걸어놓은 정치 현수막까지 짧은 찰나지만 일일이 스치며 감상하곤 한다. 하루 일상생활에서 보는 이미지들을 기록한다면 그 자체가 일기가 될 것이다.
삶의 위안을 주는 고마운 글판
서울 한복판에는 지난 30여 년간 시민에게 위안을 주고 사랑받는 고마운 존재가 있다.
바로 광화문 교보빌딩 글판이다. 일상에 지친 도시민을 위로하고 격려해 준 교보빌딩 글판은 언제부터인가 서울의 명물이 되었다.
"나뭇잎이 벌레 먹어서 예쁘다,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이번 가을 편에는 이생진 시인의 시 ‘벌레 먹은 나뭇잎’의 글귀가 실렸다. 섬과 바다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대표적 원로 시인이다. 벌레 먹은 잎사귀의 흠집에서 남을 위해 베푸는 삶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는 희생의 고귀함이 담겼다. 여러모로 어려운 정치, 경제상황이지만 서로 타인을 배려하자는 이타심을 서울시민에게 일꺠워 주고 있다.
그동안 시민에게 사랑받은 글귀를 몇 가지 떠올려 보면,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예쁘다. 너도 그렇다
– 나태주의 詩 ‘불꽃’ 중 -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 정현종의 詩 ‘방문객’ 중 -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
– 장석주의 詩 ‘대추 한 알’ 중 -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봄.
- 이성부의 詩 ‘봄’ 중 -
구부러진 길이 좋다. 들꽃 피고 별도 많이 뜨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 이준관의 詩 ‘구부러진 길’ 중 -
두 번은 없다.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그러므로 너는 아름답다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詩 ‘두 번은 없다’ 중 -
교보빌딩 글판은 가로 20m, 세로 8m의 대형 크기로 지난 1991년부터 시작하여 벌써 29살의 나이를 먹었다. 시민들에게 희망과 사랑의 메시지를 전해주고자 교보생명 창립자의 제안에 시작된 것으로 초기에는 다소 직설적이고 기업 홍보 성격이 많았었다.
감성적 메시지 변화는 1997년, IMF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시민에게 위안을 주자는 목적으로 이듬해부터는 좋은 시나 글귀가 등장하게 되었다. 지난 2000년부터는 글귀를 선정하는 위원회가 구성되고 본격적으로 시민들의 참여와 투표도 진행되며 명실공히 ‘시민을 위한 시민의 글판’으로 자리 잡으며 이제 광화문글판은 광장의 명물로 자리 잡았다.
바쁜 일상, 함께 공감하는 짧은 시(詩)
지하철역과 지하철 차량 객실은 도시민의 삶과 정서가 한껏 배어있는 곳이다. 무수한 상품 브랜드 광고, 아파트 분양 광고, 관청에서 게시하는 공익 캠페인, 지역 홍보 광고, 축제 홍보 등 오가는 이들의 관심을 끌고자 경쟁도 치열하다.
출근길 이른 아침엔 동시에 쏟아지는 승객으로 인해 분주한 터라 눈길을 줄 겨를도 없지만 퇴근길은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귀가하기에 다소 넉넉한 마음으로 각종 다양한 글귀와 그림을 마주하게 된다. (필자에게는 광고도 하나의 그림으로 느껴진다)
매 역사마다 있는 지하철 스크린 도어에 새겨진 짧은 시(詩)를 대부분은 읽어 보았을 것이다.
오늘은 퇴근길과 관련한 시 한 편 소개해 볼까?
나를 위로하며
삐뚤삐뚤/ 날면서도/ 꽃송이 찾아오는/ 나비를 보라/ 마음아
(함민복의 詩)
지친 일상의 애환을 담은 소박하고 정감 가는 시구다. 함민복 시인은 내가 좋아하는 서정시인이기도 하다.
퇴근길
하루 종일/ 넥타이에 매여 끌려 다니다가/ 그림자 밟고/ 집으로 오는 길/
골목길 돌고 돌아/ 쪽대문 밀치고 들어 서면/ 크고 작은 종이 몇 송이
소박한 저녁상 차려 놓고/ 피워내는 하얀 웃음/
내 얼굴도/ 갓 떠오른 저녁달만큼/ 환해진다.
(시민공모작-윤주영)
시민 작품인데 이 역시 공감 가고 정겨운 시이다.
지하철 스크린도어 글귀는 초기에는 유명 시인의 대표시나 유명인의 명언을 담았지만 몇 해전부터는 일반 시민의 참여도 활발하다. 위 소개한 시 ‘퇴근길’도 일반시민 공모작품이기도 하다.
서울시는 ‘세상에서 가장 큰 시집’이라 불리는 지하철 게시용 ‘시민 창작 시(詩)’ 200편을 공모했다. 공모전을 통해 선정된 시는 지하철 1~9호선, 분당선 총 299개 역 승강장 스크린도어(안전문)에 게시되었다.
시(詩)를 좋아하기에 나도 내년 시민공모에 한번 참여해 보리라. 정성 들여지어 낸 내시, 나의 글귀가 지하철 어느 역, 한 칸의 공간에서 시민들과 함께 공감할 수 있다면?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일이다.
정치 문구도 삶의 일부이다.
선거철이 가까워지면 도시 각 동네 목 좋은 네거리마다 생기는 변화중 하나는 건널목 부근 좋은 시야의 위치에 내걸리는 각 정당의 선전 현수막이다.
평소엔 없다가 대단한 정치 이슈가 생기면 어김없이 정당의 상징색을 디자인 배경 삼아 각종 현수막이 걸리지만 이 역시 나에게는 하나의 볼거리, 읽을거리로 통한다.
“어려운 경제, 주민 여러분 힘내십시오. 우리 OO당이 있습니다. “
”거침없이 퍼쓰는 예산, 대한민국 거덜 납니다. “
”어르신들이 보는 가짜 뉴스로 대한민국 청년의 미래가 죽어갑니다! “
”마을 도서관 증축 예산 확보! 항상 지역 주민과 함께 하겠습니다. “
문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역 주민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글도 있고 상대 정당을 일방적으로 비판하는 글도, 정책 성과에 대한 자화자찬 현수막도 보인다. 동네마다 제 각각 걸려있는 현수막의 내용만 보더라도 지역 현안이 무엇인지, 애로사항이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지금도 진행형이지만 지난여름 느닷없이 일본 아베 정권의 對韓 수출규제로 한일 경제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본 여행 안 가기, 일본 상품 안 사기 운동. 즉, 불매운동이 전국적으로 들판의 불꽃처럼 퍼져 나갔다. 서울 중구에는 대대적으로 ‘NO JAPAN’을 새긴 현수막, 배너가 가로등마다 설치되어 화제를 일으킨 바 있다. 비록 바로 철거는 됐지만.
”이번에는 일본에 지지 맙시다! 대한민국 국민은 강합니다 “
”오늘의 대한민국은 다릅니다. 우리가 이깁니다! “
그래도 이번 한일 분쟁에 대해서 여야가 따로 없이 같은 목소리를 내는 듯해서 반갑기는 한데,
‘그래도 이제 국회야! 일 좀 하자들~’
재미(위트) 있는 글귀를 보면 힐링이 된다!
도시의 각 거리, 동네마다 무수히 많은 가게들이 있지만 지역마다 독특한 상호와 간판을 걸어 넣고 치열한 전쟁을 펼치는 가게, 상점들이 있다. 지나가는 이들에게 색다름을 주고 심지어 재미까지 선사한다. 이 정도면 이 가게 단골이 안 될 수가 있을까? 가게 주인장들이 수준급 카피라이터인 듯.
‘인터넷 끊겨 내가 차린 PC방’ – pc방
‘저8계 콧9멍’ – 돼지 고깃집
‘머리 잘못하는 집’ – 미용실
‘머리에 무슨 일이 생길까’ - 미용실
‘밥집이라기엔 쑥스럽고 술집이라기엔 좀 그렇고’ – 식당
‘저 오늘 우럭 못 썰면 집에 못 들어갑니다’ – 횟집
‘육해공 지휘본부’ – 식당
‘그 꼴로 어디 가게?’ - 옷집
‘닭큐멘타리’, ‘닭치거라’ – 치킨집
‘인생 뭐 있어 고기서 고기지’ – 고깃집
간판도 재미있지만 점포 내부의 벽면에 써 붙인 안내 문구나 종업원 유니폼(티셔츠)에 새겨진 글귀도 무릎을 치게 하는 재치 있는 명구들이 많이 있다. 판매를 적극 권유하면서도 전혀 불편하거나 어색하지 않다. 고급 위트가 녹아 있다.
요즘 젊은 청춘 세대들이 창업 전선에 뛰어든 이가 많은 만큼 녹슬지 않은 이들의 재기 발랄하고 발칙한(?) 과감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인생 하루하루가 카피의 연속이고 삶은 영원한 이야기 소재이며 제제이다.
”오빠가 빽은 못 사줘도 닭발은 사 줄 수 있어 “
”지나친 음주는 감사합니다. “
”지금은 1인 1 닭 시대“
”외상은 어림없지~“
”살다 보니 인맥보단 치맥이더라 “
”단골손님이 너였으면 좋겠다 “
”어서 와~ 저번에도 왔었지/ 어서 와~ 오늘이 처음이지 “
”화장품 할인이 아니라 처분입니다~“
”99세 이상 흡연 가능“
”당신의 뱃살은 안녕하십니까? “ 건강관리 홍보 캠페인
”오늘도 토닥토닥이 아닌 통닭 통닭으로 나를 위로하네 “
도시민이여~
머리가 복잡할 땐 집과 사무실을 박차고 밖으로 나가 보라. 나가 보면 거리에서, 시장에서, 지하철역에서 공원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안식처들이 등장한다. 잠시 한 순간이지만 삶을 위로받고 마음속으로 통하는 메시지를 느낄 수 있다.
도시는 삶을 이야기하는 무한한 원고지이다.
도시 여기저기에 아직 여백이 많음은 누군가가 채워주리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도시의 원고지에 작품을 남길 수 있는 대상은 바로 우리 도시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