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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슬 Oct 28. 2020

제주에서는 트레이닝복과 슬리퍼라면 완벽해

유명 관광지를 화장기 없는 얼굴로 걸을 수 있다니

매일 행복한 상상을 했


피곤한 몸으로 일어나 세미 정장 차림으로 화장을 하고 머리를 하고 출근길에 오르는 일 대신 눈을 뜨자마자 날씨를 확인하고 편한 트레이닝복 차림에 화장기 없는 얼굴로 바다를 거닐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이다


제주에 왔고,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하루를 시작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였다. 눈을 뜨고 잠옷에서 편한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었다. 주스 한잔을 마시고 오늘 날씨를 확인한다


내가 제주에 있던 가을이라는 계절은 하늘이 유독 예쁜 날들이 더 많았다


'아 오늘도 날씨가 좋다' 내가 있던 게스트하우스를 청소하기 전에 바다 산책을 다녀오자며 모자를 눌러쓰고 화장기 없는 얼굴로 길을 나선다


웅성웅성


내가 살았던 협재 바다는 에메랄드빛 바다로 유명해서 서쪽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는 필수 여행지였다. 여행 온 사람들의 화려한 옷차림을 보며 생각했다.


'누군가에게는 여행지고, 나에게는 또 다른 삶이구나'


트레이닝복 차림에 슬리퍼와 화장기 없는 얼굴은 내가 진짜 제주에서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한번 더 알게 해 주었다. 삼삼오오 모여 하하호호 웃으며 사진을 찍는 가족 단위 여행객부터, 다정한 커플들이 삼각대를 놓고 사진을 찍으며 오늘을 기억하려고 노력하고 있었고, 친구들끼리 여행을 와서 예쁜 협재 바다 앞에서 인생 샷을 남기려는 사람들까지 - 보고 있으면 웃음이 절로 나는 풍경들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제주의 바다를 마주하며 내가 제주에 왔다는 걸 실감하며 마을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4년 전에도 협재 바다에서 3개월이라는 시간을 지냈던 나는, 협재 마을의 길이 익숙하기만 하다. 4년 전의 나와 4년 후의 나는 다른 마음으로 제주에 왔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제주의 풍경 앞에서 한없이 말랑말랑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된다


스스로 자책하느라 무거웠던 마음

사람을 만나는 일을 제일 좋아했지만, 사람을 만나는 일이 제일 두려워 꽁꽁 숨으려고 했던 마음

이십 대의 내 삶을 부정하고 싶었던 마음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에 무너졌던 마음

타인을 의식하느라 나를 돌보지 못했던 마음까지 모두 잊게 만드는 풍경이었다


바다와 마을 산책을 하며 다시 한번 내가 제주에 온 이유를 떠올렸다


온전히 나를 안아주지 못했던 마음들을 이곳에서 천천히 안아주기로 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 회피하려고 했던 마음들을 내가 먼저 다독여 줘야만 했다


더 이상 피하고 싶지 않았다.


힘들다는 이유로 외면하고 싶었던 수많은 마음들을 제주의 풍경 앞에서 안아주기로 했다. 누군가에게 위로받기를 기대하지 않고, 스스로를 꼭 안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다짐했다


무거웠던 마음들이 트레이닝복과 슬리퍼 차림으로 가벼워진 듯한 하루였다. 화장을 하지 않고 외출은 상상할 수도 없었던 내가 제주에서 만큼은 조금씩 가벼워지고 있음은 분명했다


조금씩 조금씩 채워나가기보다 비워내자고 다짐했다

육지에서 가득 안고 온 무거웠던 마음을 제주 바다에 던져보기로 했다


하루하루 무거웠던 마음들을 제주 바다에 풍덩 던지기 시작했고, 진짜 내가 아닌 모습들을 지워낼수록 깊은 곳에 숨어있었던 밝은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제주에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날들이었다.


비가 오지 않는 날이면 시간이 날 때마다 걸었다.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조금 더 가벼운 차림으로


제주에서는 트레이닝복과 슬리퍼도 당당한 내가 되었다, 이 마음을 잊지 말고 오래오래 산책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오늘도 나는 트레이닝복에 화장기 없는 얼굴로 바다에 간다


'안녕 제주 바다야 오늘도 반가워'

나는 제주 바다와 마주하며 그렇게 진짜 내가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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