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실수가 누군가에게는 트라우마가 되었다

아림다운 계절, 고슴도치의 스물아홉 기록

by 윤슬

아림다운 고슴도치의 스물아홉 기록

살면서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은 일들이 있다면, 최대한 빨리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들이 존재한다. 종종 많은 기억들을 지우개로 지워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지만 오히려 잊을수록 더 선명해지는 기억들에 나는 무섭고 당황스러워지는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다


내가 잊고자 하는 기억은 10년 전 여름이었다. 친구와 산책을 하고 중간에서 헤어진 뒤 집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게 늦은 시간이 아니었기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귀가를 하는 길이었고, 나 역시 그 무리 중 한 사람이 되어 주위를 두리번두리번거리며 걷고 있었다


그 당시에 납치나 여러 범죄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인터넷에 소문처럼 떠돌고 있었기에 조금 긴장한 상태였지만 긴장하지 않은 척 더 힘찬 발걸음으로 걷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라고 생각하던 그때 싸늘한 느낌과 함께 뒤를 돌아봤고, 알 수 없는 누군가는 마스크와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 나의 입을 손으로 막으며 알 수 없는 곳으로 나를 넣으려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 사람의 계획에서 조금 어긋나게 나는 조금 더 빨리 뒤를 돌아보았고 '악' 소리를 내며 최대한 그가 나를 밀어 넣는 곳의 모서리를 붙잡고 그가 힘을 주는 방향과 반대로 힘을 주었다. 나의 발악과 함께 나의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의 힘은 점점 더 세진 다는 걸 느꼈고, 나는 여기서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모든 힘을 다했던 것만 기억이 난다


그 사람이 여전히 나의 입을 막은 채 서로 얼마나 힘을 줬던 걸까

나와 그 사람은 뒤로 같이 넘어졌고 그 사람은 빠른 속도로 어딘가로 도망을 가버렸다


어떤 말도 할 수 없었고, 어떤 표정도 지어지지 않았다

눈물이 왈칵 흐를 줄 알았지만, 너무 놀라면 멍한 상태가 되어버린다는 걸 처음 알았다


단지 내가 그 사람에게서 도망쳤다는 것만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놀란 마음을 뒤로하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할 틈도 없었다







'엄마 무서워, 여기로 와줘'


엄마가 올 때까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는데 꾹 - 참았다, 무섭고 두려웠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 사람이 다시 나타날까 봐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은 척 노력하고 있는 나는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을까 - 엄마와 함께 경찰서로 향했고, 경찰차를 타고 그 사람이 내입을 막았던 동네를 한 바퀴 돌았지만 그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늦은 시간도 아니고, 사람들이 다니는 길가에서 일어난 일이었기에 경찰도 의아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사건 접수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마주한 나의 얼굴을 마주하니 참아왔던 눈물이 왈칵하고 쏟아져 버렸다. 얼굴에는 이곳저곳 긁힌 상처가 가득했고, 팔과 무릎에는 넘어지면서 생긴 상처들이 여전히 피를 흘리고 있었다. 상처의 아픔을 느낄 틈도 없던 그날의 기억은 몸의 상처보다 마음의 상처로 남아있다


그날부터 어두운 밤, 잠자리에 누워 눈을 감으면 그날의 일이 선명하게 떠올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밤이면 잠자리에 누워 하루를 마무리하는 걸 좋아하는 나는, 한순간에 밤을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다음날 그 사람이 어찌나 내 입술을 새게 눌렀는지 입술의 감각이 돌아오지 않았고, 걱정스러워하는 엄마와 함께 모든 병원을 돌았지만 의사들은 나의 이야기를 안타까워할 뿐 시간이 약이라는 이야기만을 반복했다. 마지막으로 찾은 정신과에서는 수면제를 처방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정말 시간이 약일까'


밤이면 밤마다, 그날의 악몽이 떠올랐고 다행히 수면제에 의지하며 하루하루 잠들 수 있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믿고 싶었지만, 정상적인 일상생활은 불가능했다. 다니던 아르바이트는 다른 핑계를 대며 그만두게 되었고, 밝은 낮에도 두려움을 항상 안고 있었지만 저녁 시간이 지나 밤이 찾아오면 혼자 밖을 돌아다닐 수 없었다. 누군가 내 뒤를 따라오지 않을까, 지나가던 사람이 다시 나를 쫓아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나를 더 예민하게 만들었다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고 혼자 당당하게 걸어오던 나는,

한순간에 두려움과 공포심이 가득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 후로 그 사람을 찾았다는 연락을 받고 경찰서에서 얼굴을 확인했지만, 큰 처벌을 받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왜 피해를 본 나만 힘들어야 할까' 분명 실수라고 해도, 그는 가해자였고 나는 명백한 피해자였는데 말이다


그렇게 몇 년이 흘러 '이제 조금 괜찮은 척' 살아가고 있던 시기의 나는, 그 사람을 우연히 마주한 적이 있다. '그 사람이 맞나?'라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내 몸이 먼저 반응했다. 그 사람을 보고 온몸이 굳어버렸다, 초점이 사라졌고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함께 있던 이는 급격하게 어두워진 표정의 나를 보고 '괜찮아?'라고 물었지만, 나는 그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십 년이 흘렀다,


그날 당신이 나에게 주었던 상처가 실수라고 생각해보려 했다. 잠깐의 실수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당신은 왜 그런 실수해서 나에게 이렇게 깊은 상처와 트라우마를 안겨줬는지 묻고 싶다. 어딘가에서 잘살고 있을 당신을 생각하면 그날 당신의 실수가 나에게 얼마나 큰 상처와 트라우마를 안겨줬는지 아는지 묻고 싶다


당신 때문에 나는 남자라는 존재를 두려워하기도 하고, 맑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이 어려워졌다. 나는 여전히 밤을 무서워하고, 혼자 걸어야 하는 밤을 두려워한다. 분명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었던 나는, 시간이 과연 해결해 줄 수 있을까 물음표만 가득하다


여전히 그날의 일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와르르 쏟아진다, 괜찮은 척 살아가려고 애쓰고 있지만 한 번씩 그날의 마음이 나를 꽁꽁 묶어 버린다. 여전히 내 마음 한구석에서 밀려오는 상처와 두려움을 어찌할 방법이 없어 나는 조용히 혼자 눈물을 흘리는 날이면 그날의 너의 실수를 용서할 수가 없다


당신의 실수로 나는 평생 상처와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겠지만, 누군가의 실수로 또 다른 누군가가 나처럼 평생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누군가의 실수가 누군가의 트라우마가 되는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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