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여행 스케줄이 다르기에 16명이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방에 화장실은 단 1개뿐, 한 명씩 씻는 걸 기다리다 보면 이것 또한 눈치 게임이 되곤 한다. 복잡한 걸 좋아하지 않는 나는 사람들이 준비를 마칠 때까지 침대 위에서 뒹굴 거리며 오늘 일정을 짜본다
대충 씻고 보니 수건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여행에 수건을 준비해 오지 않았는데 이곳에서는 수건 지급이 없었던 것이다. 역시 여행은 어떻게 흘러갈지 아무도 모른다. 스텝에게 문의를 드려도 도시만 여행 초보이자 극 I형이었던 나는 그냥 휴지로 슥슥 털어 내는 쪽을 택했다
'후, 쉬운 게 하나도 없군. 간단히 밥부터 먹자'
간단히 조식을 먹기 위해 1층으로 향했다. 지금은 조금 여유가 생겼지만 이 당시의 나는 낯선 공간, 처음 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조식을 먹는 일조차 어려웠던 시기였다. 누군가에게는 별일이 아니겠지만 내향형 인간에게 홀로 먹는 조식이란 작은 도전 중 하나였다
'혼자 여행 오셨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게스트하우스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흔한 질문일 것이다. 하지만 낯가림이 심했던 초보 여행자였던 나에게는 누군가의 질문은 곧 대화로 이어 지기에 가슴이 쿵쾅 거리며 식사를 해야만 했다. 누군가 나를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불편한 상황에서 빨리 해방되고 싶었다. '안녕히 계세요!' 즐거운 여행을 하라고 인사하는 스텝들에게 옅은 미소를 보내고 게스트하우스를 나왔다. '후, 드디어 나왔다' 낯선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유독 작아지는 나를 발견하곤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오! 이제 진짜 여행을 시작해 볼까?
'무식하면 용감하다'라는 말이 가장 잘 들어맞던 시기였던 것 같다
'초보 운전'이 있다면 '초보 여행자' 또한 서툰 모습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게스트하우스를 나와 목적지를 향해 갈 뿐, 제주도에 대한 이해가 전혀 되지 않은 상태로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어젯밤, 게스트하우스 2층 침대에서 넓은 지도를 펼쳐놓고 골랐던 오늘의 첫 여행지는 유리박물관이었다
어제와 다르게 화창한 6월의 제주 날씨에 괜스레 마음이 밝아졌다
묵직한 배낭을 메고 걷는 길마저도 발걸음이 가벼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일주 버스가 도착했다. '오! 오늘은 운이 좋군!' 버스가 일찍 왔다는 사소한 일에도 의미 부여를 할 정도로 설레는 시작점이었다. 한 5 정거장 갔을 때쯤, 다음 버스로 갈아타기 위해 하차 벨을 눌렀다. 맑은 하늘, 제주의 낮은 지붕들을 보며 소소한 제주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있었다. 버스정류장에 작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언제 와?' 버스를 기다리기 시작한 지 30분이 지나도록 버스는 오지 않았다
버스정류장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했다
나처럼 배낭을 메고 있는 여행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육지와 다르게 제주는 버스 도착 예정 시간이 뜨지 않았던 시기였다. 버스를 1시간째 기다리니 점점 포기하고 싶어졌다. 유리박물관을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하나 싶었지만 그럼에도 가보고 싶었던 곳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12시가 되자 햇볕은 더욱 뜨거워지고 여행의 설렘으로 가득 찼던 버스정류장의 사람들 역시 하나 둘 지친 기색을 하고 있었다
오! 주황색 버스가 하나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물어볼 용기가 없던 찰나에 함께 버스를 기다리던 다른 여행자분이 질문을 하셨다. '기사님 혹시 유리박물관 가나요?' "일단 타서 조금 걸어가야 해요!"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를 기다리기보다 버스를 타서 조금 걸어가도 되겠다고 생각해 하나 둘 탑승하는 여행자를 졸졸 따라 나도 버스에 올라탔다
'여기서 내려서 걸어가시면 돼요'
함께 탔던 여행자들이 내리는 것을 보고 졸졸 따라 내렸다. 기사님은 분명 '조금' 걸어가면 된다고 하셨지만 표지판에 적혀 있는 숫자로는 목적지까지 3KM를 가리키고 있었다. 인생에서 숫자를 보고 걷는 일이 많지 않았기에 '3'이라는 숫자가 꽤 소소해 보였고 나는 이것 또한 다행이라며 씩씩한 발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6월의 화창한 날씨에 배낭을 메고 차도 옆의 작은 길을 따라 뚜벅뚜벅 걷기 시작했다
첫 여행에 나름 멋을 낸다고 짧은 미니스커트에 나시 입고 장발을 휘날리며 말이다.
뚜벅뚜벅 걷는 내 옆으로 렌터카들이 하나 둘 빠른 속도로 지나가기 시작했다
인도가 없어 차도 옆으로 조심조심 걷고 있는 나를 반겨 주는 건 길가에 묶여 있던 말들 뿐이었다. 제주도의 지리도 잘 모르면서 왜 유리박물관을 가겠다고 이 고생을 하고 있던 걸까, 스스로에 대한 원망과 더운 날씨를 탓하며 뚜벅뚜벅 걸으며 묵묵히 다짐했다, 다음 제주 여행에는 꼭 면허정을 따서 운전을 하겠노라고 말이다.
'아이코, 아가씨 어디서 왔어요?'
1시간쯤 걸었을까. 겨우 도착한 유리박물관에서 매표를 하기 위해 땀을 뻘뻘 흘리고 있던 나에게 직원분은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셨다. '아! 저기 입구에서부터 걸어왔어요, 하하. 날씨가 엄청 덥네요' 평소의 나였더라면 그저 머쓱하게 웃고 넘겼을 테지만 한 시간을 걷고 나니 누군가의 걱정이 따스하게 느껴졌다. '짐을 좀 맡길 수 있을까요?' 평소의 나였더라면 조금 무겁더라도 가방을 메고 여행했을지도 모르지만 열심히 걸어온 만큼 제대로 즐기고 싶은 마음에 나도 모르게 적극적인 사람으로 변신해 씩씩하게 질문을 하고 있었다
'후! 이제 정말 여행을 해볼까?'
배낭을 맡기고 몸도 마음도 가벼워졌다. 이곳을 잘 빠져나갈 궁리도 해야 했지만 일단 잘 도착했으니 이곳을 즐기고 싶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용돈으로 산 소중한 미니 DSLR 카메라와 핸드폰 사진을 번갈아가면서 찰칵찰칵 찍기 시작했다. 내가 정한 목적지를 향해 오는 과정은 고단했지만 목적지에 도달하니 또 다른 뿌듯함과 감사함이 가득해졌다. '잘했어! 아주 잘했어!' 포기하지 않고 첫 목적지까지 무사히 찾아온 내가 대견하게 느껴졌다
"기사님, 혹시 서일주 버스 타는 곳까지 가나요?"
뚜벅이 여행자에게 여유란 찾아볼 수 없었다. 해가 지기 전에 오늘 숙소까지 이동해야 했기에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버스정류장에서 우연히 지나가는 버스 한 대를 만났다. 일단 차를 세워 기사님께 다음 버스를 탈 수 있는 정류장에 가는지 물었다. '네, 타요' 짧고 굵은 한마디에 속으로 '올레!'를 외쳤다. 버스를 타는 일이 일상에서는 버스가 자주 있었기에 딱히 별 생각하지 않았는데, 제주에서는 엄청난 감사함으로 다가왔다
'감사합니다!!!!!!!' 서일주 버스 탈 거면 여기서 내리라는 말에 후다닥 인사를 건네고 버스에서 내렸다
이제 20분에 한 대 정도는 있는 서일주 버스를 기다리면 되니 마음이 평온해졌다. 오늘의 숙소는 시장 안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였다. 수많은 곳들 중에 이곳을 택한 건 다름 아닌 저녁 식사를 함께 한다는 점이었다. 소정의 비용으로 시장 통닭과 회를 사서 함께 먹는 소소한 저녁 파티, 혼자 여행을 하며 끼니를 잘 챙기지 못했던 나에게 딱인 게스트하우스였다
'아이코, 아가가 왔네. 잠깐만요'
사장님의 어머니로 보이시는 분이 사장님이 곧 오실 거라고 알려주셨다. 어딘가 모르게 특별한 느낌의 소유자였고 말괄량이 삐삐 느낌이 인상 깊었다. 간단히 설명을 듣고, 저녁 파티 참석 여부를 물으셨다. '네! 참석할게요!' 하루 종일 굶은 티가 났을지도 모르는 대답이었다. 잠시 후 시장에서 먹을거리를 사서 들어온 사장님이 우리를 하나 둘 부르기 시작하셨다
'안녕하세요' 7명 정도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둥근 테이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시장 통닭과 회를 앞에 두고 침묵의 공기는 꽤 무겁게 느껴졌다. '이제 먹을까요?' 여사장님의 발랄함 덕분에 분위기가 한결 나아졌고 식사가 시작되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처음 모인 이들의 대화는 보통 나이, 지역, 여행일정 등으로 이어진다. "제주 여행"이라는 공통의 키워드가 있으니 조금 덜 불편하게 느껴졌다
이곳에서는 모두 여행자이지만 20대부터 60대까지 나이도, 직업도, 지역도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앉았다
또래 친구들과의 시시콜콜한 대화 속에서만 살아 봤던 나는, 다양한 세계가 모여 있는 지금 이 순간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홀로 이곳까지 흘러 오지 않았더라면 느껴보지 못했을 감정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다음에도 혼자 와도 괜찮겠는걸?' 하루종일 외로움이라는 감정과 싸우다가 새로운 감정과 마주했던 밤이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맥주 한잔을 위해 서귀포항 쪽으로 산책을 나섰다. 평소의 나였더라면 아마 오늘은 이만 쉬겠다고 했을지도 모르지만 다양한 연령대의 넓은 대화에 참여하는 일이 꽤 즐거웠던 것 같다. 음료 한잔과 다양한 주제의 대화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밤이 참 아름답다' 홀로 떠나온 곳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색다른 대화는 혼자 여행을 떠나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생각했다
게스트하우스의 아침은 소소한 조식으로 시작된다
빵 한 조각과 우유 한 컵을 마시며 사장 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행을 하면서 찍었던 사진들을 언니에게 보여줬는데 내 카메라에는 들꽃 사진으로 가득 차 있었다. '들꽃이 참 많네! 들꽃 사진들을 모아봐도 좋겠다!'내가 좋아하는 풍경들을 가득 담아 놓은 카메라 속 사진들을 통해 내가 꽃을 참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나는걸 다시 한번 알게 된 순간이었다. 역시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자꾸만 시선을 빼앗기나 보다. 나는 제주의 길에서 제주 들꽃들을 가득 만나며 꽤 행복한 여행을 하고 있었구나 느꼈던 날
'언니! 다음에 또 올게요!'
이 게스트하우스에 오지 않았더라면 내 첫 제주 여행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을까 싶다. 경주 살이를 통해 혼자 있는 시간에 꽤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장소가 바뀌고 또 다른 외로움이 찾아오자 나는 높은 파도를 만난 듯 휘청이고 있었다. 나를 찾아오는 외로움에 흔들리기보다 그 흔들림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혼자 여행은 외롭다고만 생각하던 찰나에 만났던 게스트하우스의 사람들 덕분에 외로움은 풍요로움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여행뿐만 아니라 인생도 비슷하지 않을까. 혼자 여행하면서 느꼈던 허전함은, 어쩌면 인생에서 언젠가는 겪어야만 하는 피할 수 없는 감정 중 하나 일 테니까. 사람마다 진한 외로움을 겪는 시기만 다를 뿐이다
첫 제주 여행에서 만났던 외로움은 한순간에 사라지지 않았다. 다음 여행에서도, 그다음여행에서도 또 다른 형태로 나를 찾아와 자주 흔들었다. 내 마음에 찾아온 감정을 외면하기보다 좋은 감정으로 덮어쓰기를 하고 싶었다.외로움으로 마음이 가득 찼을 때 이 마음을 감사함으로 바꾸고 싶었다
문득, 혼자 하는 여행을 통해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채우고 싶다는 용기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던 걸까.
누구보다 낯을 가리는 나였지만 저녁 파티에 참석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일에 용기를 내어 보기도 하고, 버스에서 타고 내릴 때마다 기사님에게 씩씩한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늘 용기가 부족했는데 제주에서는 소심한 용기가 솟아났다. 버스를 1시간 정도 기다려보니 버스의 타이밍이 잘 맞는다는 것도 굉장한 감사함이 되었다. 진심이 생기니 용기를 내는 일도 어렵지 않게 느껴졌다 '감사합니다!' 배낭을 메고 내리며 기사님들께 큰 목소리로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늘 부족하다고만 생각했던 부분에 작은 용기를 내는 일,
오늘 하루가 힘든 기억으로만 남지 않았던 이유는 작은 용기를 내는 연습을 이어 왔던 덕분이지 않을까.
'내가 왜 제주에 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있을까?'
혼자 떠나온 여행에서 무한한 행복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시시때때로 나를 찾아오는 힘든 순간들을 혼자 감당해한다는 점이 가장 큰 어려움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홀로 떠나온 여행에서는 모든 과정의 선택과 결정을 내가 해야 했고, 그 결정으로 인해 내가 감당해 내야 할 것들이 많아졌으니 말이다
처음 홀로 제주의 길을 걸으며 스스로 다짐한 일들을 떠올려 본다
'집에 가면 바로 면허정을 따야지' '늘 감사함을 잊지 말아야지' '함께 하는 순간의 소중함에 감사해야지'
실제로 나는 집으로 돌아와 바로 면허 학원에 등록했다. 갑작스러운 면허 등록에 잔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새벽 6시 운전 연수를 받으며 면허증을 바로 딸 수 있었다. 늘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내 일상에 대한 감사함이 깊어졌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버스들, 친구들과의 만남, 가족과의 도란도란한 식사. 그 어떤 것 하나도 당연한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밤이었다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표현을 아끼지 말자'
혼자 하는 여행에서 가장 깊게 배운 마음은 다름 아닌 '감사함'이었다. 건강한 두 다리로 여행할 수 있음에 감사했고 힘들지만 혼자 여행을 올 수 있었던 작은 용기에 감사했다. 제주의 특성을 잘 몰라 열심히 걸어야만 했지만 그럼에도 제주의 버스에 대해 알게 되었으며 저녁에는 게스트하우스의 매력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으니 감사한 일 투성이었다. '힘들다, 지친다, 외롭다'라는 부정적인 마음을 뒤로하고 내가 그렇게 찾아 헤매던 마음은 작은 행복들이었던 게 아닐까
혼자 떠나는 여행도 함께 떠나는 여행도 모두 힘든 순간들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순간이 찾아오면 모든 걸 포기하고 내려놓지 말고 한 발자국 걸어 보는 건 어떨까. 힘들다고 포기하는 순간 내가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힘들지만 '그럼에도' 정신으로 한 발자국을 더 걸어 보면 또 다른 풍경을 마주 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10년 전 처음으로 혼자 떠났던 여행의 기억이 짙은 이유는,
그 여행에서 수많은 마음을 배웠기 때문이 아닐까.
작은 용기가 나지 않는 날이면 나는 혼자 걸었던 3KM를 떠올려 본다.
'그럼에도!' 일단 한걸음 걸어갈 용기를 내본다면 작은 행복들이 나를 찾아올 것이라고 믿으며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