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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몽인 Mar 08. 2024

가녀장의 시대

이슬아

한국 출판계에 한 획을 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이슬아 작가님이 쓴 첫 소설집, '가녀장의 시대'를 읽었다.


몇 년 전 독립서점에서 '일간 이슬아'라는 벽돌 종이책을 마주하고 홀린 듯 사서 읽었던 것이 이슬아 작가님과의 첫 인연이었다.

글에서 벌거벗고 있는 듯한 솔직함과 깊이 있는 진실성이 느껴져 미친 듯이 빨리 읽었던 기억이 난다.

탑스타의 무명 시절 1집이 가장 생생하고 값지듯 이슬아 작가님의 첫 인쇄물의 라이브한 신선함에 매료되었었다.  


이메일로 매일 글을 발송해 주는 시스템, 한 편에 100원.

출판사가 필요 없는 작가-독자의 일대일 매칭으로 글을 펴내던 이슬아 작가님은 어느새 본인이 출판사를 차렸고 수많은 책을 만들며 우리 세대에 가장 진취적이고 급진적인 작가가 되었다. 에세이와 인터뷰집을 주로 작업하던 그녀가 처음으로 소설로 만든 책이 ‘가녀장의 시대’다.


물론 나는 이 글이 종이 인쇄물로 나오기 전 메일로 연재할 때부터 받아 읽던 글이었다. 완전히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소설이라기 보단, 작가님의 자전적인 이야기에 조금의 허구가 첨예된, 소설인가~ 에세이인가~ 정확한 구분이 없는 글이다.

대화형식으로 호흡이 짧은 글이 많아서 그런지 드라마 대본집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찾아보니 드라마로 각색이 될 예정이라고 한다.

드라마를 생각하고 쓴 글인지, 쓰고 나서 드라마화 작업을 하시는 중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읽기에는 아주 쉬운 책이니 편안한 마음으로 시도해도 될 거다.



 

낮잠 출판사의 대표인 가녀장, 슬아

낮잠 출판사의 직원이자 슬아의 엄마, 복희

낮잠 출판사의 직원이자 슬아의 아빠, 웅이


세 명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가족 소설인데 가부장, 가모장도 아닌 가녀장 집안의 이야기다.




“젊음은 괴로워… 너무 많은 가능성이 있거든.”
복희가 묻는다.
“그게 행운이지, 왜 괴로워?”
정수리를 굴리던 슬아가 대답한다.
“다 해봐야 할 것 같잖아. 안 누리면 손해인 것 같잖아.”
복희는 다 해 볼 수는 없다고 말하려다가 만다. 슬아도 이미 알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이렇게만 말한다.
“인생에서 손해 같은 건 없어.”
정말 그런가, 하고 슬아는 생각한다.
“누굴 얼마나 만나봐야 진짜 충분하다고 느낄까.”
복희는 그런 충분함 같은 건 영원히 없다고 말하려다가 만다.


너무 하고 싶은 게 많고 궁금한 사람도 많은 내가 하는 고민과 비슷하다.

그래서 얼른 나이가 들었으면 하면서도 지금처럼 에너지 많고 잃을 게 없을 때 더 쏘다니며 경험하고 싶다.




슬아가 허공을 보며 중얼거린다.
“무슨 일을 해도 괴로운 건 마찬가진데….”
“잘하고 싶은 일로 괴로우면 그나마 낫잖아.”


일을 하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제일 많이 하는 생각이 두 가지 있다.

1. 돈을 받고 하는 일은 힘든 일이 있을 수밖에 없다. 마냥 즐길 수 있는 일은 돈을 내고 하는 것이다.

2. 하고 싶은 일, 하기 싫은 일, 모두에 괴로움이 따른다면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 자체에 만족하며 열심히 하자.


그래서 슬아의 말이 좋았다. ‘잘하고 싶은 일로 괴로우면 그나마 낫잖아.’


“누구를 만나느냐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어.”
“뭔데.”
“일단 자기 자신이랑 사이좋게 지내야 해.”
(….)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자기 자신이랑 헤어질 수는 없잖아.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우정인걸. 자기 자신과의 우정 말이야.”
미란이가 멍을 때린다. 잠자코 있다가 묻는다.
“너는 너랑 잘 지내? “
슬아는 대답한다.
”상사처럼 대해. “
”왜?”
“상사가 없으니까.”
“그럼 좋은 거 아니야?”
“엄격하게 지켜보는 사람이 없으면 일을 완성할 수가 없어.”
“그래서 스스로 상사가 된다고?”
“자신을 너무 풀어줄지 않는 거지.”
“그게 자신이랑 사이좋게 지내는 거야?”
“좋은 복지 혜택을 제공하는 유능한 상사처럼 나를 대한다는 얘기야.”


절제와 통제가 기반되는 내 성향상 스스로를 아끼는 친구처럼, 사랑하는 연인처럼 대하는 건 어렵다.

그렇기에 유능한 상사처럼 나에게 맛있는 거 잔뜩 먹이고 좋아하는 자연 보여주며 힐링시켜줘야겠다.



슬아의 글쓰기에도 분명 최초의 ‘너 때문에’가 있었다. 유치원 숙제 때문이었던가. 할아버지에게 보내는 생신 축하카드 때문이었던가. 자신을 계집애라고 부르는 삼촌을 욕하기 위해 쓴 일기 때문이었던가. 이제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상관이 없어졌다. 삼십 년간 너무나 많은 이유들이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글을 쓰고 싶게 만드는 자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좋은 너. 미운 너. 웃긴 너. 우는 너. 아픈 너. 질투 나는 너. 미안한 너. 축하받아 마땅한 너. 대다 한 너. 이상한 너. 아름다운 너. 다만 운이 좋지 않았을 뿐인 너. 동물인 너. 죽은 너. 잊을 수 없는 너.
그런 너를 보고 듣고 맡고 만지고 먹고 기억하는 나. 문학의 이유는 그 모든 타자들의 총합이다.


나는 언제부터 글을 썼을까. 블로그와 일기장에 글을 퍼부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는 다 나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고 생각했다.

지나고 보니 타인들이 내 삶 속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글에 열정적으로 임했던 것 같다.

지금은 그때와 같은 열정은 사라졌지만 글을 쓰고 싶다는 욕구는 은은하게 남아있어 이렇게 다른 작가의 책이라는 타자의 힘을 빌리고 있다.


태어나서 좋은 점은 행복한 감정을 느낄 수 있어서다. 예를 들어 엄마 품에 안길 때, 학교에 갈 때, 글쓰기 수업을 할 때 나는 행복한 감정을 느낀다.
그럴 때면 나를 태어나게 해 준 엄마와 아빠한테 고맙다. 태어나서 안 좋은 감정을 느낄 때도 종종 있다.
예를 들어 엄마가 화낼 때, 친구와 싸울 때, 친구들 앞에서 망신당할 때 그렇다. 그럼 마음속으로 ‘나는 왜 태어난 걸까?’ 생각한다. 어쩔 땐 태어나서 기쁘고 때때로 슬프기도 하다.
태어났던 순간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뭔가 신기하고 당황했을 것 같다. 어쩌면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것도 태어나서 할 수 있는 능력이다. 다시 태어난다면 나로 태어나고 싶다. 내가 언제나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내가 나를 좋아하는 마음이 더 크기 때문이다.

-9살 아이의 글


[내가 언제나 마음이 들지는 않지만, 내가 나를 좋아하는 마음이 더 크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간직하고 싶은 문장이다.


이런 상상을 해보기로 한다. 하루 두 편씩 글을 쓰는데 딱 세 사람에게만 보여줄 수 있다면 어떨까.
세 명의 독자가 식탁에 모여 앉아 글을 읽는다. 피식거릴 수도 눈가가 촉촉해질 수도 아무런 반응이 없을 수도 있다. 읽기가 끝나면 독자는 식탁을 떠난다. 글쓴이는 혼자 남아 글을 치운다. 식탁 위에 놓였던 문장이 언제까지 기억될까? 곧이어 다음 글이 차려져야 하고, 그런 노동이 하루에 두 번씩 꼬박꼬박 반복된다면 말이다.

그랬어도 슬아는 계속 작가일 수 있었을까? 허무함을 견디며 반복할 수 있었을까? 설거지를 끝낸 개수대처럼 깨끗하게 비워진 문서를 마주하고도 매번 새 이야기를 쓸 힘이 차올랐을까? 오직 서너 사람을 위해서 정말로 그럴 수 있었을까? 모르는 일이다. 확실한 건 복희가 사십 년째 해온 일이 그와 비슷한 노동이라는 것이다.


매일 밥을 차리고 치우고를 반복하는 복희를 공감하고 이해하려는 슬아의 상상.

사람은 다 자기가 하는 일이, 내가 처한 상황이 제일 크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 보려는 노력을 하냐, 안 하냐가 큰 차이를 만든다.

슬아의 상상처럼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가족이라는 타인의 입장을 고려하려는 노력이 너무 예뻐 보였다.


나도 글이 써짐과 동시에 후루룩 사라져 버린다면 그 허무함을 견디며 계속해서 쓰는 행위를 할 수 있을까 싶다. 누군가가 읽어준다는 것과 오래 간직된다는 점이 글의 가장 큰 특징이니깐.




복희에게 아름다움이란 계절의 흐름, 맑은 날에나 궂은날에나 자라기를 포기하지 않는 존재들.
웅이에게 아름다움이란 슬픔과 기쁨의 극치를 다 아는 가수의 목소리. 밥하고 글 쓰는 두 여자.
슬아에게 아름다움이란 단정하고 힘 있는 언어, 그리고 동료가 된 모부의 뒷모습.
지구에서 우연히 만난 그들은 무엇보다 좋은 팀이 되고자 한다. 가족일수록 그래야 한다는 걸 잊지 않으면서.

월화수목금토일이 반복되는 이유는 월요일부터 다시 잘해보기 위해서라고. 다시 잘해볼 기회를 주려고 월요일이 어김없이 돌아오는 거라고. 그러느라 복희는 창틀을 닦고, 웅이는 바닥을 밀고, 슬아는 썼던 글을 고치고 또 새 글을 쓴다고.
월요일은 또 돌아올 것이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세계의 아름다움 역시 달라질 것이다


지난 1년 6개월 정도 직장생활을 하며 엄마, 아빠와 함께 살았다.

성인이 되자마자 타지로 일찍이 나가버린 세월 때문인지 처음엔 조금 어색했다.

그래도 휴학생활 동안 진호와 조금, 귀전과 조금 둘이서 살아봤던 경험이 있어서 금방 적응해 갔다.

가족의 품은 참 따뜻하고 편한 만큼 의지하게 되어 나도 모르게 타인이라는 선을 훌쩍 넘어버린다.

쉽게 화를 내고 무례하게 말을 하고 소통이라는 핑계 삼아 갈등을 계속해서 만들어내던 나였다.


지금 혼자 나가 사니 다시금 그들이 타인으로 보인다.

그래서 더 존중하게 되고 이해하게 되고 사랑하게 된다. 우리는 조금 떨어져 있지만 좋은 팀이 되고자 한다.

모두가 개인의 삶에서 가장으로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으니깐.


가족.

가장 사랑하면서 가장 어렵고 가장 애틋한 관계인 가족에 대해 생각하게 된 책이었다.


p.s) 귀전(엄마)이 먼저 이 책을 읽고는 본인도 가녀장 집안에서 살고 싶다고ㅋㄷ

열심히 돈 벌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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