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언 헤어, 버네사 우즈
꽤 오래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이었다.
다정함을 요하는 에세이로 보이지만 실은 과학 연구를 토대로 논리적인 결론을 도출하는 과학서에 가깝다.
지금껏 우리 인간이라는 종이 살아남았던 것은 결국 친화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
하지만 그 친화력 때문에 갈등과 분열이 따라온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나아가야 하는 방향은 여전히 다정이라는 것이 이 책에서 말하고 싶은 이야기다.
탄탄한 논리적인 근거가 중요한 사람에게는 조금은 공감하기 힘든 결론일 수 있지만, 전하고자 하는 전체적인 메시지가 중요한 나에게는 재밌는 이야기였다.
다른 사람 종이 멸종하는 와중에 호모 사피엔스를 번성하게 한 것은 초강력 인지능력이었는데, 바로 협력적 의사소통 능력인 친화력이다. 우리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누군가와 하나의 공동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함께 일할 수 있다.
(…)
우리는 걸음마를 떼거나 말을 배우기 전부터 이러한 기술을 습득하는데, 이것이 곧 복잡한 인간관계와 문화적 세계로 통하는 관문이 된다. 친화력은 타인의 마음과 연결될 수 있게 하며, 지식을 세대에 세대를 이어 물려줄 수 있게 해 준다. 또 복합적인 언어를 포함한 모든 형태의 문화와 학습기반이 되었으며, 친화력을 갖춘 사람들이 밀도 높게 결집했을 때 뛰어난 기술을 발명해 왔다. 다른 똑똑한 인류가 번성하지 못할 때 호모 사피엔스가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특정한 형태의 협력에 출중했기 때문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친화력을 통해 지식과 문화를 세습해 가며 종을 이어간다는 것이 우리의 진화를 설명해 준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공동의 목표가 있다면 협력한다는 점은 지금 일하는 조직에서 많이 느끼고 있다.
물론 상사의 사업장에 소속되어 돈을 받고 일하는 직원으로서 따라야 하는 것들이지만 단순히 돈을 넘어 동료들과 협력하고 있다는 느낌이 많이 든다.
공동의 협력이 서로 간의 애정을 만들어 지속 가능한 발전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호모 사피엔스의 경우, 이미 큰 뇌를 지니고 문화를 발전시킨 사람 중 조상이 이 자연선택에 성공했다. 자기가축화는 다른 동물 종들에게서도 일어났을 수 있지만, 자기가축화 과정이 시작될 때부터 극도의 자제력을 지녔던 것은 우리 종뿐이었다. 자기가축화 과정을 겪으며 감정반응을 더욱 억제함으로써 신중하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우리의 능력이 한층 더 강화된 것이다.
(…)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감정반응을 억제하고 관용을 베푼 뒤 돌아오는 보상을 계산할 줄 알았다는 점에서 우리가 그 어떤 종과도 확실하게 다르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바로 이 자제력과 감정조절 능력이 결합되어 사람 고유의 사회적 인지능력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네가 동물이냐?”라는 말을 할 때는 이성을 거치지 않고 감정만 따랐을 때, 더 나아가 본능에만 충실했을 때 사용하곤 한다.
그럼 ”인간이다. “라고 답하기 위해선 ‘자제력과 감정조절‘이 필요하다.
어디선가 ‘자기 절제가 곧 자기 사랑’이라는 말을 보았다. 어쩌면 인간의 사회적 인지능력이 자제력에서 시작되었으니 찰나의 쾌락에 가까운 충동을 참는 것이 인간이 자신을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는 방법일 수도 있겠다.
사람 자기 가축화 가설은 우리가 친화력을 지닌 동시에 잔인한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잠재력도 지닌 종임을 설명해 준다. 외부인을 비인간화하는 능력은 자신과 같은 집단 구성원으로 보이는 사람에게만 느끼는 친화력의 부산물이다.
(…)
우리에게는 우리와 다른 누군가가 위협으로 여겨질 때, 그들을 우리 정신의 신경망에서 제거할 능력도 있는 것이다. 연결감, 공감, 연민이 일어날 수 있던 곳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다정함, 협력,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우리 종 고유의 신경 메커니즘이 닫힐 때, 우리는 잔인한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
친화력을 가진 인간이기에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는 말은 모순적이면서도 사람의 특성을 잘 설명해 준다.
친화력을 느낄 수 있는 ’ 나와 비슷한 사람’의 영역이 견고해지기 위해 그 반대에 있는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한 경계가 더 강하게 나타난다.
아이러니하게 사람들에게 다정하기 위해 또 다른 사람들과는 분열하고 갈등한다.
남 뒷담을 해야 친해진다는 말이 그냥 있는 게 아닌 듯^^,,
긍정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접촉은 격의 없는 한 번의 대화나 공동작업이나 인종통합반처럼 거창하지 않은 형태가 될 수도 있다.
접촉은 식당 같은 장소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경우도 있고, 연구실에서 인위적으로 고안되는 것도 있다. 사회적으로 가장 비인간화되는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 예를 들면 노숙자들과의 긍정적인 접촉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공감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어떤 외부 집단에 대해서 인간적인 어휘를 사용하며 말하는 정도만으로도 그 사람들과 접하거나 사귀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다.
나치정권 때 위험을 무릅쓰고 유대인을 숨겨주었던 독일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남들보다 훨씬 더 이타적이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한 번이라도 접촉이 있었던 이웃, 친구인 유대인에게 당연한 도움을 한 것이었다.
내 친구가 힘든 상황에 있으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처럼, 친구가 유대인이었기에 두려움 보단 당연한 호의가 나온 것이다.
이처럼 친화력을 느끼는 방법은 거창하지 않다.
한 두 번 스쳐 지나가며 보았던 얼굴 일수도, 짧은 눈인사를 나누었던 눈 일수도, 간단한 안부를 주고받았던 입일 수도 있다.
하지만 거창하지 않더라도 타인을 향한 열린 마음은 필수라는 생각이 든다.
서식지는 바뀌었지만 우리 종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우리는 큰 규모의 집단 안에서 협력하며 살아갈 때 가장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종이다.
우리는 출신이 다양한 사람들과 생각을 교류할 때 가장 혁신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사는 사회의 건축물이 관용을 베풀 때 그 안의 개인들도 관용을 베풀 수 있다.
건강한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두려움 없이 서로를 만날 수 있고 무례하지 않게 반대 의견을 낼 수 있으며 자신과 하나도 닮지 않은 사람들과도 친구가 될 수 있는 공간을 설계할 필요가 있다.
다시 돌아와 호모 사피엔스 인종의 진화는 적자생존이 아니라 다정함, 즉 친화력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렇게 대를 이어갔고 협력을 통한 발전을 이루었다.
지금 현재는 어떤가? 인류 발전의 한계에 도달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물리적으로는 환경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고, 정신적으로는 분열, 갈등이 빚어낸 인간 간의 혐오가 빗발치고 있다.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책 제목이 말해준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은 적을 정복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친구를 만들었느냐로 평가해야 한다.”
친근하고 익숙한 존재를 더 많이 만들고 더 공감하고 더 사랑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