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상혁 Jan 01. 2021

교사의 글쓰기

혹은 글쓰기 너머의 교사

그렇다면 교사의 글쓰기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첫째, 아이들의 삶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되 그들을 글의 소재로 대상화해서는 안된다. 둘째, 교실과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상으로부터 시작하되 자신의 행위를 미화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서술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나 자신과 학생, 그리고 학교를 넘어 학교 밖의 시각에서 학교를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  




1.

1999년 서울의 한 사립중학교에 교사로 채용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수업지도안과 수업시연이었다. <단원의 목표>를 '지식', '이해', '문제해결', '태도'의 측면으로 나누어 제시하고, '학습지도계열', '준비학습요소', '동기유발내용'으로 <단원을 개관>했다. 그 다음으로는<학습내용분석>, <단원의 평가>, <지도상의 유의점> 등을 서술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본시지도안>이었는데, 왜냐하면 이를 수업시연을 통해 정확하게 구현하는 능력이 교사채용의 결정적 요소였기 때문이다.


학교에 부임하고 나서도 한 동안 검정색 비닐커버의 삼공 바인더에 수업지도안을 끼워서 교무부에 제출했었던 기억이 난다. 이것 말고도 출석부를 기록하고, 결재를 받기 위해 기안문을 작성하고, 연말에 생활기록부를 작성하는 것 등이 대체적인 교사의 글쓰기였다. 다만, 당시에도 <우리교육>이 정기적으로 발행이 되던 터라 훌륭한 선배교사들의 사유와 실천을 확인할 수 있기는 했다. 그러난 글쓰기의 일반적 주체는 여전히 기자, 교수, 운동가였고, 평범한 교사에게 '읽기'와 '쓰기' 사이의 간극은 멀기만 했다.


지난 20년을 돌이켜 보면 교사의 글쓰기에 많은 변화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교수학습과정을 표준화되고 규격화된 문체로 작성하는 <지도안 쓰기>, '학교생활기록부 기재요령'대로 작성해야 하는 학생의 <학교생활기록 쓰기>, '공문서규정'에 따라 작성해야 하는 <기안문 쓰기>까지 교육행정적 글쓰기가 여전히 중요한 위치에 있지만 학교교육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교육적 순간'들을 포착하여 작성한 질적/성찰적 글쓰기가 확대된 것이다. (지금 알라딘 교육 베트스셀러를 검색해 보라. 저자의 대부분이 교사다.)



2.

물론 모든 변화에는 그 변화를 만들어낸 단초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직접적일수도 있지만 간접적일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항상 겸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나에게는 이오덕의 <삶과 믿음의 교실>(1978)이 있었고, 조한혜정의 <글 읽기와 삶 읽기 1~3>(1995)가 있었으며, 이혁규의 <수업: 누구나 경험하지만 누구도 잘 모르는>(2013)이 있었다. 나에게 인상적으로 남아있는 대목을 옮겨본다.


아이들의 비뚤어진 삶을 애통하게 여기는 것은 그 아이들의 본성을 믿기 때문이지만, 아이들의 현실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사람은 아이들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아이들을 멸시하면서 아이들이 병든 까닭을 아이들 자신에게 돌린다. (중략) 이런 사람일수록 현실에 대한 거짓 증언을 하고, 아이들 세계를 부질 없이 미화한다.

- 이오덕(1978), <삶과 믿음의 교실> 중에서


나는 여기서 자신의 문제를 풀어갈 언어를 가지지 못한 사회, 자신의 사회를 보는 이론을 자생적으로 만들어 가지 못하는 사회"를 '식민지적'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여기서 '식민지성'은 딱히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현상을 뜻하기보다는 지식과 삶이 겉도는 현상을 뜻한다.

- 조한혜정(1995),  <글 읽기와 삶 읽기 1> 중에서


나는 익숙한 일상을 낮설게 보는 시선이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교육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본다. 이런 시선이 왜 필요하고 중요할까? 우리들 대부분이 낡은 습속의 늪에 안주하면서 구질서를 재생산하고 있음을 간파하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행동은 반성과 성찰보다는 어릴 때부터 몸에 내면화된 습속의 지배를 너무 많이 받는다. (중략) 그것이 습속이 지니는 무서운 보수성이다.

- 이혁규(2013), <수업: 누구나 경험하지만 누구도 잘 모르는> 중에서


왼쪽부터 이오덕, <삶과 믿음의 교실, 조한혜정, <글 읽기와 삶 읽기>, 이혁규, <수업>



3.

철학자 김영민의 책 중에 <인간의 글쓰기 혹은 글쓰기 너머의 인간>이라는 책이 있다. (이 글의 제목은 김영민에 대한 오마주임을 밝힌다.) 김영민의 글과 사유에 대한 명성은 그전부터 들어는 보았지만 실제로 그의 글을 접하게 된 것은 박준규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탈식민성과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1996)을 보면서 부터다. 이 책에서 김영민은 "원전에 매달려 그 주위를 뱅뱅 돌며 살아가는 '원전바라기'를 청산하고 아직은 작고 힘이 없지만 자기 목소리를 만들어가는 학문적 성숙은 이제 줏대와 용기와 자긍심의 문제가 되었다"고 말하면서, "논문이란 눈치 보는 글쓰기의 전형이며, 글쓰기에서 눈치 보기의 전형이 바로 원전중심주의"라고 일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글쓰기의 태도와 정신에 대한 이러한 문제제기는 이오덕, 조한혜정, 이혁규 등을 통해 반복적으로 천명되었던 것이기도 하다.  


2021년 새해 첫 날, 교사의 글쓰기에 대해 생각한다. 교사의 글쓰기는 교사의 말하기를 단순히 글로 옮기는 것을 넘어 교사가 읽는 텍스트 그리고 그가 오감을 통해 듣는 컨텍스트들과 연결된다. '삶을 위한 교육'을 말할 때 우리는 학생들의 '삶'이란 과연 무엇이며, 무엇이어야만 하는가에 대해 나름대로의 교육적 입장을 지닐 수밖에 없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 어떤 고귀한 말로 표현한다 하더라도 '끼니'를 떼우지 못하는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대한민국의 교사가 (비유컨대) '생계형 예술가' 혹은 '비전업 작가'와 같은 위치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너무나도 확고한 경쟁체제 속에서 참교육을 말하는 것은 자칫 위선이거나 방임이 되기 십상이다. 학생의 성적을 높이기 위해 애쓰는 것과 그 속에서도 무엇인가 교육적인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분투하는 것. 그 경계에 서서 끝가지 위태로운 줄타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 교사의 글쓰기는 그런 성찰과 고백의 시공간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교사의 글쓰기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첫째, 아이들의 삶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되 그들을 글의 소재로 대상화해서는 안된다. "이런 사람일수록 현실에 대한 거짓 증언을 하고, 아이들 세계를 부질 없이 미화한다"는 이오덕 선생님의 경고에 귀기울여야 한다. 둘째, 교실과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상으로부터 시작하되 자신의 행위를 미화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서술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자신의 수업을 직접 촬영해보거나 공개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혁신학교의 수업공개 문화가 중요한 까닭은 수업이라는 행위에 대한 성찰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셋째, 나 자신과 학생, 그리고 학교를 넘어 학교 밖의 시각에서 학교를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 이혁규의 말마따나 "우리의 행동은 반성과 성찰보다는 어릴 때부터 몸에 내면화된 습속의 지배를 너무 많이" 받기 때문이다. 학교라고, 교육이라고 전혀 다르지 않다. 


김영민, <인간의 글쓰기 혹은 글쓰기 너머의 인간>
이전 12화 '비판의 언어'와 '가능성의 언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