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친다는 것의 의미
글을 쓴다는 것
글을 쓴다는 것은 고된 작업이다. 특히 교과서를 쓰는 것처럼 제한조건이 많고 비평자도 많은 글은 더더욱 어렵다. 교과서의 글은 다섯 부류의 독자 - 학생, 교사, 공저자, 편집자, (검정)심사자 - 를 만족시켜야 한다. 첫째, 학생. 학생들이 쉽고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는 교과서를 쓰는 것은 모든 필자의 꿈이다. 둘째, 교사. 그러나 실질적으로 교과서를 선정하는 사람은 교사다. 따라서 교사가 좋아할 만한 - 무엇보다도 수업하기에 편리한 - 교과서여야 한다. 이상적인 교사상을 지향하되 현실적인 교사상를 고려해야 하므로 '교사가 좋아하는 교과서'를 쓴다는 것 역시 상당히 까다로운 미션이다. 셋째, 공저자. 일반적으로 교과서는 혼자서 쓰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한번에 오케이가 되는 일은 절대 없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초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구겨진 자존심에 중도에 하차하는 사례도 발생한다. 넷째, 편집자. 솔직히 말해 집필자는 교과서가 망해도 먹고 사는 데 큰 지장이 없지만 편집자 입장에서는 자신의 생업이다. 너무 파격적이어도 안되지만 너무 평범해서도 안된다. 무엇보다 많이 팔려야 한다. 다섯째, (검정)심사자. 집필자와 심사자만큼 서로 배타적인 관계도 드물 것이다. 집필자와 심사자는 서로의 '실력'을 의심한다. 심사자는 교과서가 어떻게 이렇게 허접할 수 있느냐고 혀를 끌끌 차지만 집필자는 심사자의 동떨어진 조언에 헛웃음만 나올 때가 있다. 물론 집필자가 '을', 심사자가 '갑'이다. 불합격의 멍에를 쓰지 않기 위해서는 교육과정 적합성이라는 검열을 신경쓰지 않을 수가 없다.
작업의 현실이 이렇다 보니 어느샌가 교과서를 쓰는 일이 고역이 되어 버렸다. 머릿 속으로 끙끙 앓기만 하고 진도가 나가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스트레스만 받는 나에게 짝꿍이 한 마디 해 주었다.
하고 싶다고 아무나 할 수 있는 거 아니잖아. 쉽다면 중요한 일일리도 없고. 화이팅!
가르침, 매혹과 소명
그런데 글을 쓰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있다. 바로 가르치는 것이다. 당연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가르침은 교사의 영원한 숙제이자 매혹적인 주제다. 어떤 교사는 가르친다는 것에 자신의 인생을 건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아름답게 보인다. 교사의 소명만큼 매혹적인 것을 나는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많은 교사들에게도 동일한 것 같다. 적어도 에어스, 우치다, 배너, 캐넌, 바우어, 파머 그리고 하이데거에게는.
(학교에는) 사려 깊고 관심을 쏟아주는 어른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 여전히 있다. 길러주고 고무할 수 있는 사람, 지도하고 이끌 수 있는 사람, 이해하고 관심을 가져줄 수 있는 사람이. 사회에서는 여전히 부당함과 결함이 남아 있고 그걸 해결해야 할 필요는 더욱 절박하다. 여전히 바꾸어야 할 세상이 있다. 개인적인 세계를 하나씩 바꾸어나가는 것도 포함해서. 교실은 아이들에게는 물론 교사들에게도 가능성과 변화의 공간이 될 수 있다. 교직은 여전히 세상을 바꾸는 일이 될 수 있다. 학교와 교실이라는 힘든 공간에서 우리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몸을 바치는 교사들이 아직도 필요하고, 사실 이전 어느 때보다 더 절실히 필요하다.
- 월리엄 에어스, <가르친다는 것>
교사 자신이 배움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보여주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배우는 방법은 지금 배우고 있는 사람에게서만 배울 수 있습니다.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 지금 이 순간도 계속 배우고 있는 배움의 당사자가 아니면 아이들은 배우는 법을 배울 수 없습니다. … (중략) … 그것은 말을 바꾸면 "내가 과거에는 스승의 제자였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교단을 사이에 두고 이루어지는 지성의 운동을 믿는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나에게 스승이 있었다" 바로 이것이 교사가 고백해야 할 최초의 말이자 최후의 말입니다. 그러므로 배움의 장은 본질적으로 3항의 관계입니다. 스승과 제자 그리고 그 장에 없는 스승의 스승. 그 3자가 없으면 배움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 우치다 타츠루, <교사를 춤추게 하라>
가르침은 교사가 학생에게 끼치는, 그리고 끼쳐야만 하는 영향력을 자각한 뒤에 이를 위해 자신을 바쳐야 하는 일이다. 이처럼 폭넓은 인격을 요구하는 소명은 다른 일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배움에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막중한 도덕적, 인간적 책임이 뒤따르는 가르침에는 그보다 더 큰 노력이 필요하다.
- 제임스 배너 주니어, 해럴드 캐넌 <훌륭한 교사는 이렇게 가르친다>
교사만큼 다양한 능력을 요구받는 직업도 별로 없다. 전문지식은 기본이고, 강력한 카리스마와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적응력은 물론 직감적인 감지 능력도 필요하며, 전혀 다른 학생들의 성격에 대한 이해심, 저항력, 역풍이 불어닥칠 때 이를 잘 다루는 능력 그리고 무엇보다 리더십이 필요하다.
- 요아힘 바우어, <학교를 칭찬하라>
훌륭한 가르침은 젊은 사람들을 향한 환대의 행위이다. 환대는 손님보다는 주인에게 더 많은 덕이 돌아가는 행위이다. 환대의 개념은 호혜주의가 흥성했던 고대에서 생겨난 것이다. (……) 환대를 제공함으로써, 사람들은 모두가 서로 의지하는 사회조직의 무한한 연결망에 참여한다. 손님에게 내 준 음식과 숙소라는 선물은 주인에게는 희망의 선물이 되는 것이다. 교육 역시 이런 호혜주의의 정신을 이어받아야 한다.
- 파커 J. 파머, <가르칠 수 있는 용기>
Teaching is more difficult than learning; for only he who can truly learn . . . can truly teach. The genuine teacher differs from the pupil only in that he can learn better and that he more genuinely wants to learn. In all teaching, the teacher learns the most.
- Martin Heidegger, <Modern Science, Metaphysics and Mathematics>
흔히 '교과서적 지식'이라는 표현처럼 교과서는 실제적인 지식을 담고 있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이 좀 더 의미를 가지려면 교과서를 넘어서는 지식이란 과연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어떤 형식으로 담아낼 수 있는지를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 주어진 것조차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면서, 학생들에게 배움을 일으키지 못하면서, 학교 현장 속 학생들의 배움과 교사들의 가르침을 의미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몰지각하다 못해 폭력적이다. 진정한 교사는 자신의 말과 행동이 일관적이다. 그는 학생을 대상화하거나 도구화하지 않는다. 찰나의 인생, 영겁의 시간 속에 교사와 학생은 촌각을 다투며 이 세상에 잠깐 나타난 동시대인이다. 진정한 교사는 학생과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는 교사다. 흔히 어른들에게 전달되는 지식보다 아이들에게 전달되는 지식이 더 쉽고 하찮을 것으로 예상하는데 사실은 정반대다. 인류의 지혜와의 첫 조우를 주선하는 가르침의 성공적인 수행을 위해 얼마나 다양한 교육이론들이 등장했는지 생각해보라. (다행스럽게도) 아이들은 사람의 진심을 신뢰한다. 그들은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삶에 대한 희망과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은 존재들과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교사는 행복한 사람이다.
아이들/학생들
교사의 최고 보람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노고를 학생들에게 인정받는 것 아닐까? 내가 그래도 꽤 괜찮은 교사임을 알려주는, 아니 착각하게 만드는 아이들의 편지와 수업평가를 다시 읽었다. 행복하다. 잠시 '이젠 이런 날도 없겠구나...' 싶었지만 금새 마음을 고쳐 먹었다. 여차하면 다시 돌아올 것이다. 내 인생 한번도 어디에 목매 본 적이 없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의 발걸음은 나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향할 것이다.
편지지 모양은 왜 항상 직사각형이죠? 그 고정관념을 깨서 좀 특별한 평행사변형 편지지를 만들어 봤습니다. 근데 문제가 하나 있어요. 정교하게 아름답게 접고 싶었으나 평행사변형의 성질때문에 불가능하네요.
쌤의 수학 사랑이 너무 각별하셔서 저까지 '와 진짜 수학 막 엄청 신성하고 대단한 학문인가봐.' 하는 생각이 가끔 들던 게, 세뇌당했나봐요. ㅋㅋ
제 생애 (태어난지 15년 밖에 안 지났지만) 수학을 열정적으로 가르쳐주신 분은 선생님 뿐이었어요! 매 수업마다 “수학은 이런 거에요. 참 아름답죠.” “수학은 참 쉽단다.” “발표해보자”... 등의 긍정적+선생님 특유의 말투가 섞여서 재밌는 수업시간이었어요.
제가 항상 졸지만 선생님 수업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항상 이해하기 쉽게 활동과 섞어서 수업을 해주신 점 감사합니다. 제가 존건 정말로 사과드립니다. 죄송하고 심하게 꾸중하시지 않아서 감사합니다.
수학을 싫어하는 나로써는 수학을 못해도 선생님은 나무라지 않으시고, 잘 가르쳐주시며 선생님 재미있으시다.
역시 수학 마법은 이런 것일까요? 선생님 덕분에 수학이 더 잘 이해되고 너무너무 재미있었어요. 선생님이 계속 학교에 계시면 좋겠어요.
수업에 늘 열정적이시고, 수학에 즐거움을 깨워주게 하시려고 하십니다.
너무너무 착하시고 우리를 존중해주신다. 우리가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신다. 그 다음은 너무 많아서 생략
아마도 마지막이지 싶은, 그러나 진도는 더없이 더디기만 한 수학 교과서 작업 중에 학생들이 나에게 수여한 ‘과정중심평가’를 들여다본다. 혼자 흐뭇하게 웃는다. 슬며시 활기가 솟아 오른다. 자세를 고쳐 앉고 다시 精.進.한.다.
교사의 進路
나의 초창기 교사 생활은 형편없었다. 열등감과 콤플렉스도 많았다. 내가 교사를 하는 게 과연 맞는 일인가 고민하고 있을 무렵, 까마득한 선배 교사로부터 칭찬을 듣게 되었다. 한 번으로 끝나는 칭찬이 아니었다. “윤 선생, 오늘 시간 돼?” 맥주와 치킨을 즐기셔서 가끔 호프집에서 독대를 하곤 했는데 내가 하는 이야기들 - 교육에 대한 설익은 생각들 - 을 메모까지 하며 감탄을 하시는 것이 아닌가. “윤 선생, 지금 시간 돼?” 얼마 후 공강 시간에 가 보니 메모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당신께서 정리하신 구상을 보여 주시면서 “이거 윤 선생이 생각한 것과 맞는지 보고 틀렸으면 좀 고쳐 봐” 이러시는 것이 아닌가. ‘나한테 이런 면이 있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뭔가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무척 뿌듯했었다. 그 당시 내가 제안한 것 중 하나는 그 선배 교사의 지지와 지원 속에 ‘작은 학년제’라는 이름으로 실현되었고 그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2년간 학년부장을 맡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선배 교사는 20여 년 차이가 나는 까마득한 후배 교사를 진심으로 동료로 생각한 것이다. 그 선배 교사는 사람의 내면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재능을 스스로 찾아낼 수 있게 도와주는 진정한 교사였다고 생각한다.
그 선배교사는 당시 우리학교의 교장이었다. 그것도 타학교 평교사 출신의 공모교장이었다. 교장직을 수행하는 동안 일주일에 4시간씩 수업을 했다. 임기를 마쳤을 때 재단에서는 연임을 요청하였으나 거절하고 우리학교의 국어교사가 되었다. 그의 정년 마지막 해를 기억한다. 시조시인이기도 했던 교장은 자신이 가르치는 3학년 학생들 모두에게 시조를 한 편씩 써 주었다. "나랑 졸업동기잖아." 진심어린 시조를 쓰기 위해 학생 한명 한명과 교무실에서 대화를 나누던 그 모습이 지금도 그립다. 그렇게 타학교 출신의 공모교장은 나의 동료교사가 된 채 교직을 마무리했다.
최근 교장의 자격에 대한 논의가 뜨겁다. 나는 교장의 자격이란 교사의 자격의 일부라 생각한다. 교사로서 자격없는 자가 어떻게 교장이 될 수 있겠는가? 많은 이들이 현재의 승진제도에 대하여 비판을 하고 있다. 비판의 초점은 교사로서 자격이 없는 자가 교장이 되려 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승진제도가 교장의 자격을 얻기 위해 교사로서의 자격을 헌신짝처럼 던지는 구조라는 것이다. 정말 그러한가? 그렇다면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왜 많은 교사들이 그러한 선택을 감행하는 것일까?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생애사적 관점에서 교사직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가르침에 대한 모욕이 횡행한다. 그런 상황에서 어떤 제도가 도입되더라도 가르침으로부터의 도피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교장제도의 개선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교사 정책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교사의 삶을 돌아봐야 한다. '교사의 진로'에 대한 총체적인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런데 얼마 전 폴란의 글을 읽다가 울컥하고 말았다.
오늘날 교사교육에 관해 오가는 미사여구에도 불구하고, 교사교육에 대한 투자가 성과를 낼 것이라는 진정한 믿음이나 자신감은 부재한 것 같다. 아마도 많은 리더들이 가슴 깊은 곳에서는 가르치는 일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느끼고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정책입안자들도 교실에서 수천 시간을 보냈고 최소한 탁상공론은 할 줄 아는 전문가들이다. 그리고 이들도 매년 자격 미달의 수많은 교사들이 교실에 배정되어 현장에서 학습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교사교육에 대한 투자는 단기전략이 아니다. 이 모든 문제에 대한 즉각적인 해결책을 요구받는 사회는 효력 발휘에 몇 년이 걸릴 예방 전략을 간과하기 쉽다. 위기가 닥칠 때 리더는 그것을 다루어야 한다. 위기를 예방하는 방책은 중장기적으로는 훨씬 낮은 비용이 들지만 실현되기가 매우 어렵다.
- 마이클 폴란, <학교개혁은 왜 실패하는가>
국경을 초월하는 교사교육의 난맥상. 교사는 막대한 헌신을 요구받지만 그 어떤 지원도 제대로 받고 있지 못한 현실을 목도한 것이다. 아무도 교사의 삶과 진로에 대하여 신경써주지 않는 현실. 가르침에 대한 모욕과 배움에 대한 무지가 횡행하는 이 시대에 교사는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할까. 나의 동료들. 나의 아이들.
가르친다는 것
아이들은 성장한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주 극심한 학대만 아니라면
아이들은 원초적인 생명의 힘으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간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착각하게 만든다
우리가 아이들을 그럭저럭 잘 가르치고 있다고
가장 큰 문제는
가르치는 일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인식이다
이러한 인식이야말로 탁상공론의 명백한 증거다
‘가르침’의 의미를 지우려는 모든 행위는
그 의도가 아무리 선하다 할지라도
폭력적이며 무책임한 결과를 가져온다
가르침과 배움은 함께 일어난다
가르침이 없는 배움도
배움이 없는 가르침도
존재할 수 없다
가르침과 배움은
우리가 평생을 짊어지고 가기에 아깝지 않은
인간의 본성에 관한 주제다
끝까지 절망하라
배우는 자에게 희망을 가져다 줄 것이다
끝까지 낙관하라
그것이야말로 가르치는 자의 숙명이다
가르침은 교사의 영원한 숙제이자 매혹적인 주제다. 어떤 교사는 가르친다는 것에 자신의 인생을 건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아름답게 보인다. 교사의 소명만큼 매혹적인 것을 나는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많은 교사들에게도 동일한 것 같다. 적어도 에어스, 우치다, 배너, 캐넌, 바우어, 파머 그리고 하이데거에게는.
진정한 교사는 자신의 말과 행동이 일관적이다. 그는 학생을 대상화하거나 도구화하지 않는다. 찰나의 인생, 영겁의 시간 속에 교사와 학생은 촌각을 다투며 이 세상에 잠깐 나타난 동시대인이다. 진정한 교사는 학생과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는 교사다. 흔히 어른들에게 전달되는 지식보다 아이들에게 전달되는 지식이 더 쉽고 하찮을 것으로 예상하는데 사실은 정반대다. 인류의 지혜와의 첫 조우를 주선하는 가르침의 성공적인 수행을 위해 얼마나 다양한 교육이론들이 등장했는지 생각해보라. (다행스럽게도) 아이들은 사람의 진심을 신뢰한다. 그들은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삶에 대한 희망과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은 존재들과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교사는 행복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