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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상혁 Sep 12. 2015

가르친다는 것

교실을 살리기 위해 애쓰는 모든 교사들에게

함께 읽는 책 No. 01

윌리엄 에어스(2012), 『가르친다는 것』


월리엄 에어스(2012), 『가르친다는 것』



교사라면 누구라도 그러하듯


"3학년 올라가서 선생님들께 버릇없이 굴지 말고, 지각하지 말고, 아침에 군것질 하지 말고, 예쁜 얼굴로 못생긴 말(욕) 하지 말고, 책상 위에 다리 올리지 말고, 피부 상하니까 두껍게 화장하지 말고, 치마 너무 짧게 입고 다니지 말고 … (중략) … 항상 당당하게, 자신감 있게, 긍정적인 마음으로, 도전정신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줘~"

지난 2월 종업식을 마치고 나서도 허전한 마음에 반 카톡에 올렸던 잔소리입니다.

교사는 자신이 맡은 학생들을 사랑해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선생님을 원하는 학생이 있을까요?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선생님을 원하는 학부모님이 있을까요? 본성과 의지로 학생을 사랑했는데 1년이 지나면 어김없이 사랑했던 아이들과 이별해야 하는 것이 교사의 운명인 것입니다. 

선생님은
학생들 마음에 색깔을 칠하고 생각의 길잡이가 되고
학생들과 함께 성취하고 실수를 바로잡아주고
길을 밝혀 젊은이들을 인도하며
지식과 진리에 대한 사랑을 일깨웁니다.
당신이 가르치고 미소 지을 때마다
우리의 미래는 밝아집니다.
시인, 철학자, 왕의 탄생은 선생님과
그가 가르치는 지혜로부터 시작하니까요.

- 케빈 윌리엄 허프, <선생님은>


다시 윌리엄 에어스를 읽다

종업식 다음 날 아침, 장영희 선생님이 번역하고 김점선 선생님이 그림을 그린 케빈 윌리엄 허프의 詩 <선생님은>을 읽으며 다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문득 교사에게 있어서 봄방학은 허전한 마음을 달래고 추슬러서 새로운 마음으로 새 학기를 시작하라고 주어진 시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마음으로 새 학기를 시작하기 위해 집어든 책이 바로 이 책,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왜 가르치는가? 왜 지금 가르치는가? 주변에서 누군가가 그 일은 하지 말라고, 교직은 극도로 고된 일인 데다가 마땅히 받을 자격이 있는 존경이나 급료도 받지 못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가르치는 것을 고집하는가?"


책의 첫머리에 이 책의 저자인 월리엄 에어스는 지금 이 곳의 교사들에게 묻습니다. “왜 가르치는가?”


사실 요즘만큼 ‘가르친다는 것’에 대하여 회의가 들 때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가르치는 일 자체에 대한 회의라기보다는 가르치는 일에 대한 사회적인 오해 혹은 왜곡된 시선 때문입니다. 제가 보기에 대한민국 교사에 대한 두 가지 모순된 시각이 있습니다. 하나의 시각은 "교사라서 힘들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의 시각은 "교사라서 좋겠다"라는 것입니다.


첫째, "교사라서 힘들겠다"라는 시각은 단순히 얘기하면 "요즘 아이들 가르치기 힘들겠다"라는 것입니다. 학생이 교사에게 대드는 것은 예사이고, 순진한 교사를 놀리거나 심지어는 멱살잡이까지 하는 시대이니까요. 결국 이 시각은 사회적으로 점점 초라해지고 있는 교사의 위상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교사라서 좋겠다"라는 시각은 쉽게 말해 "방학이 있어서 좋겠다"라는 것입니다. 이 부러움 속에는 ‘남들은 평일 칼퇴근은 고사하고 연차도 눈치 보면서 쓰고 있는데 여름방학 겨울방학, 게다가 봄방학까지? 이거 너무 심한 거 아냐?’라는 속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결국 이 시각은 사회적으로 점점 열악해지고 있는 노동 조건에 대비되는 교사의 근무환경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 모순된 시각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매우 속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시각 속에는 사실 교사의 역할에 대한 의구심과 과소평가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거칠게 말해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무능력하고 방학 때는 놀고먹는 것이 교사”라는 시각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당혹감 속에서 만난 월리엄 에어스의 질문은 저에게 너무나 현실적이면서도 무거운 질문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왜 가르치는가?”

“오늘날에는 교직이 그만큼 매력적으로 여겨지지도 그만큼 절실하게 여겨지지도 않는다. 많은 학교가 해결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를 짊어진 처참한 상태에 있을 뿐 아니라, 편협하고 이기적인 생각이 사회를 지배한다. 이상주의자들을 어리석은 사람이라 부르고, 학교가 모든 아이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아이들에게 맞춰진 곳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그림의 떡 같은 소리라고 한다. 전투적인 사회적 진화론에 발맞춰 가속된 사회에서, 공적 생활에서 도덕성이 설 자리는 없다는 냉소주의가 팽배한 오늘날에 가르치는 일은 헛고생으로 보인다.”

미국의 현실을 말하고 있는 글쓴이의 지적은 우리의 현실과도 정확히 맞아 떨어집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냉혹한 현실이 잘못된 교육 탓일까요? 솔직히 말해 학교라는 공간은 사회 축소판 혹은 거울입니다. 주의산만, 무기력, 집단 따돌림, 폭력은 학교의 무능력 이전에 사회의 무능력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학교는 점점 더 무능력한 공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게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교사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학교는 힘없고 소외된 아이들을 위한 마지막 보루이기 때문입니다.

“(학교에는) 사려 깊고 관심을 쏟아주는 어른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 여전히 있다. 길러주고 고무할 수 있는 사람, 지도하고 이끌 수 있는 사람, 이해하고 관심을 가져줄 수 있는 사람이. 사회에서는 여전히 부당함과 결함이 남아 있고 그걸 해결해야 할 필요는 더욱 절박하다. 여전히 바꾸어야 할 세상이 있다. 개인적인 세계를 하나씩 바꾸어나가는 것도 포함해서. 교실은 아이들에게는 물론 교사들에게도 가능성과 변화의 공간이 될 수 있다. 교직은 여전히 세상을 바꾸는 일이 될 수 있다. 학교와 교실이라는 힘든 공간에서 우리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몸을 바치는 교사들이 아직도 필요하고, 사실 이전 어느 때보다 더 절실히 필요하다.”

대한민국 교사에 대한 두 가지 모순된 시각 - “교사라서 힘들겠다“ & "교사라서 좋겠다" - 에 대한 저의 생각을 밝히면서 이 글을 끝맺을까 합니다.

나는 교사라서 힘들다. 
하지만 그것은 아이들 때문이 아니라 
내가 간직하고 있는 소명의 무게 때문이다.
나는 교사라서 행복하다.
하지만 그것은 칼퇴근과 방학 때문이 아니라
항상 설레는 마음으로 맞이하는 아이들 때문이다.



개인적인 세계를 하나씩 바꾸어나가는 것도 포함해서. 교실은 아이들에게는 물론 교사들에게도 가능성과 변화의 공간이 될 수 있다. 교직은 여전히 세상을 바꾸는 일이 될 수 있다. 학교와 교실이라는 힘든 공간에서 우리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함께 읽는 책 No. 01

윌리엄 에어스(2012), 『가르친다는 것』

월리엄 에어스(2012), 『가르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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