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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상혁 Sep 15. 2015

태초에 스승이 있었다

교육은 함께 추는 춤과 같다

함께 읽는 책 No. 03

우치다 타츠루(2012), 『교사를 춤추게 하라』


우치다 타츠루(2012), 『교사를 춤추게 하라』


"여기서 내 역할은 연결하는 거야. 배전반처럼 이것저것 연결하지. 여기는 매듭이야. 그래서 나는 연결해. 따로따로 떨어지지 않도록 제대로 꽉 연결하는 거야. 이게 내가 해야 할 일이야."

- 무라카미 하루키, 『댄스, 댄스, 댄스』   

   


배움으로 연결된 스승과 제자     


미래세대와 현세대를 연결하는 자, 스승. 5월 15일은 스승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교사로서 스승의 날을 맞이하는 기분이 좋지만은 않습니다. 한동안 스승의 날만 되면 교사의 촌지 문제가 미디어를 장식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스승의 날은 교사가 촌지 받는 날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과연 스승의 날이 필요한 것인가’, ‘굳이 스승의 날이 있어야 한다면 졸업식 이후인 2월로 옮기자’와 같이 스승의 날 무용론 혹은 자조론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런 씁쓸한 현실과는 달리 스승의 날은 충청남도의 강경여자고등학교에서 청소년적십자를 중심으로 병중에 있거나 퇴직한 교사를 위문하던 활동에서 유래하였습니다. 1963년 전국청소년적십자(JRC) 중앙학생협의회에서 ‘은사의 날’을 제정한 것이 스승의 날의 시초인데, 이 후 세종대왕의 탄신일인 5월 15일이 스승의 날로 지정됩니다.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처음으로 제작한 한글 문서 『석보상절』에 ‘스승’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등장한다고 하니 상당히 적절한 날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스승’이라는 말의 어원이 ‘스님’과 같다는 것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알다시피 스님은 승려의 높임말로써 승려가 자신의 스승을 부를 때 쓰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스승’을 말할 때는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과 전수받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넘어 같은 길을 걷는 동료로서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제자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의 스승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스승과 제자로 묶어주는 유일한 연결고리는 바로 ‘배움’이고요. 그래서 이 책의 저자 우치다 타츠루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교사 자신이 배움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보여주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배우는 방법은 지금 배우고 있는 사람에게서만 배울 수 있습니다.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 지금 이 순간도 계속 배우고 있는 배움의 당사자가 아니면 아이들은 배우는 법을 배울 수 없습니다. … (중략) … 그것은 말을 바꾸면 "내가 과거에는 스승의 제자였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교단을 사이에 두고 이루어지는 지성의 운동을 믿는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나에게 스승이 있었다" 바로 이것이 교사가 고백해야 할 최초의 말이자 최후의 말입니다. 그러므로 배움의 장은 본질적으로 3항의 관계입니다. 스승과 제자 그리고 그 장에 없는 스승의 스승. 그 3자가 없으면 배움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일어나는 배움이란 곧 인식론적 호기심을 말합니다. 깨달음을 얻는 것. 이것이 배움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배워야 (또는 가르쳐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미래세대가 구세계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

둘째, 미래세대가 구세계를 변혁할 수 있는 능력     

이를 한나 아렌트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교육은 우리가 세계에 대해 책임을 질 만큼 세계를 사랑할지, 같은 이유로 세계의 갱신 없이, 즉 새로운 젊은 사람들의 도래 없이는 파멸이 불가피한 세계를 구할지를 결정하는 지점이다. 또한 교육은 우리가 아이들을 우리의 세계로부터 내쫓아 그들이 제멋대로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그들이 뭔가 새로운 일, 뭔가 예측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지 않으며, 또한 그들이 공통의 세계를 새롭게 하는 임무를 담당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시킬 정도로 그들을 사랑할지를 결정하는 지점인 것이다.

- 한나 아렌트, 「교육의 위기」      



교육개혁의 주체는 누구인가     


이 시대는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처럼 현세대가 미래세대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피크 오일, 지구온난화, 핵사고 등의 전 지구적 위기로부터 고령화, 저출산, 비정규직노동 등 우리 눈앞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현세대가 미래세대에 떠넘긴 부채는 어마어마합니다. 그러니 교사는 구세계의 일원임에도 불구하고 미쳐 돌아가는 현세대의 약탈적 착취로부터 미래세대를 보호하는 자기분열적인 역할을 감당해야만합니다.      


세월호 이후의 교육에 대하여 생각합니다. 세월호 참사는 이 사회가 명령하는 사람은 있으나 책임지는 사람은 없는 사회임을 여실히 드러냈습니다. 우리 사회의 위기는 결국 민주주의의 위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에 대해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주인은 누구인가? 국가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마찬가지 질문을 우리 교육에 던질 수 있습니다. 학교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교육개혁의 주체는 누구인가?   

“사회제도의 결함을 바로잡는 것은 ‘우리들’입니다. “책임자 나와!”하고 외쳐도 아무도 나오지 않습니다. 국민이 주인인 민주국가에서 사회제도 결함의 책임자는 국민 자신입니다. 교육개혁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육제도에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은 ‘우리들’입니다. 자기가 할 일은 제도 결함의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뿐이고, 결함을 고치는 것은 ‘다른 누군가’의 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학생이 행복하지 않은 학교는 미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교사가 행복하지 않으면 교육은 바뀔 수 없습니다. 우치다 타츠루는 학교의 주인은 교사와 학생이라고 말합니다. “교사가 없는 교육, 아이가 없는 교육 그 어느 쪽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교육이라는 것은 결국 “가르침과 배움의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교육은 살아 숨 쉬는 것입니다. 교사와 학생이 서로를 바라보며 움직이는 것입니다. 교실 문이 열리고 그 곳에 학생과 교사가 있는 동안은 어쨌든 계속 움직여야 합니다. 가르침과 배움이 일어나야 합니다. 저는 배움의 힘을 믿습니다. 교육개혁은 그 속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당신도 가능한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돼. 꼼짝 않고 앉아서 뭔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안 돼. 그래봤자 아무 데도 갈 수 없어. 알았어?”

“안다고.” 나는 말했다. “그래서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은 거야?”
 “춤추는 거야.” 요우남은 말했다.

“음악이 울리고 있을 동안은 어쨌든 계속 춤추는 거야. 내가 말하는 것을 알겠어? 춤추는 거야. 계속 춤추는 거.”     

- 무라카미 하루키, 앞의 책



교육이라는 것은 결국 “가르침과 배움의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교육은 살아 숨 쉬는 것입니다. 교사와 학생이 서로를 바라보며 움직이는 것입니다. 교실 문이 열리고 그 곳에 학생과 교사가 있는 동안은 어쨌든 계속 움직여야 합니다. 가르침과 배움이 일어나야 합니다. 저는 배움의 힘을 믿습니다. 교육개혁은 그 속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함께 읽는 책 No. 03

우치다 타츠루(2012), 『교사를 춤추게 하라』

우치다 타츠루(2012), 『교사를 춤추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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