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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상혁 Sep 14. 2015

탈주와 안주를 넘어

실천하는 교사와 깨어 있는 시민을 위한 웅숭깊은 사유

함께 읽는 책 No. 02

함영기(2014), 『교육사유』


함영기(2014), 『교육사유』


“어떤 이는 한국 교육은 조종(弔種)을 울린 지 오래라고 말한다. 학교를 붙들고 개선을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자기기만이라고 한다. 차라리 학교를 탈출하여 다양한 배움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정직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탈(脫)학교 상상은 대중적 학교의 탄생과 더불어 끊임없이 있어 왔다. 자기 치유력을 갖지 못한 학교가 그 상상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과연 한국 교육은 희망이 없는 것일까요?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제가 쓰고 있는 이 글이나 제가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을 읽는 일 자체가 의미 없는 짓이 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 교육에서 희망을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 가장 큰 원인 제공자는 바로 학교이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저자인 함영기 선생님은 우리 교육의 문제에 대하여 고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아이들이 바로 이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학교를 탈출하지 못한, 아니 탈출할 수 없는 수많은 아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얽히고 설킨 실타래의 끝단을 찾는 심정으로 사회, 개인, 학교, 교사, 학생, 수업, 평가에 대한 개인의 실천과 제도의 개혁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여는 글에서 교육에 대한 사유가 '탈주와 안주를 넘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현실에 안주하는 사람은 교육에 대한 '사유'없이 기계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사실 그것은 실천이라기보다는 관행과 습속에 따라 생각없이 반복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교육에서의 '사유'는 오직 '실천'을 바탕으로 합니다. '실천'없는 사유는 현실과 단절되어 있기에 자칫하면 탈주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유'와 '실천'은 탈주와 안주 사이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 내는 원동력인 동시에 '구조'와 '개인' 사이의 관계처럼 상호 보완적인 위치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자가 책의 제목을 '실천하는 교사, 깨어 있는 시민을 위한' 교육 사유라고 붙인 이유입니다. 



과연 우리는 아이들에게 공정한 기회를 주고 있는가?     


자사고 문제가 논란이 되었을 무렵, 한 편에서는 자사고로 인해 일반고가 무너지고 있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었습니다. 거칠게 말해 성적이 우수한 중학생들을 특목고, 특성화고 뿐만 아니라 자사고에까지 빼앗기게 되어 일반고는 슬럼화가 되어가고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일면 동의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한 마음이 들었던 것은 과연 일반고는 ‘우수한 인재’ 확보라는 마인드로부터 자유로운가, 자사고가 없던 시절 일반고는 성적에 구애받지 않는 전인교육을 실시해 왔던가라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성적순으로 쾌적한 자율학습 공간을 제공하거나, 소위 명문대 진학률을 학교 홍보의 수단으로 삼는 일반고들을 그동안 많이 봐왔기 때문입니다. 교육기회의 균등은 학교라는 제도 속에서 뿐만 아니라 교실이라는 실천의 공간 속에서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학습소외가 많은 아이들에게서 기회를 박탈하고 있다. 학습소외는 크게 보면 대입 시스템이나 학교 교육과정 등 구조적인 요인에서 비롯하지만, 작게는 교사를 통하여 일어나기도 하고, 수업방법 혹은 평가방법 때문에 일어나기도 한다. … (중략) … 가령 판서와 설명 위주의 수업에서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던 아이가 협동학습, 프로젝트 학습 등의 참여형 수업에서는 굉장히 즐거워하는 경우도 있다. … (중략) … 나아가 지필시험에서는 전혀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아이가 말하기나 공작 등에서는 높은 성취를 보이는 경우도 있다. … (중략) … 이런 아이들은 자기가 선호하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면 늘 실패와 절망을 반복하다가 학교를 마칠 수밖에 없다.”    

 

제도의 개혁은 개인의 실천이 병행되지 않는다면 효과를 거두기 어렵습니다. ‘일반고 전성시대’는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을 확보하는 것으로부터가 아니라 성적에 상관없이 모든 학생이 행복하게 학교를 다닐 수 있는 환경 – 교사의 실천, 수업방법 및 평가방법의 개선 - 을 조성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물론 개인의 실천만을 강조하는 것은 구조적인 요인만 강조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고 위험한 일입니다. 지난 2015년 3월 15일 교육부는 수학 포기자, 일명 ‘수포자’를 줄이기 위한 방안으로 ‘제2차 수학교육 종합계획’을 발표하면서 학생들이 수학에 흥미를 느끼도록 문제풀이 위주가 아닌 원리와 개념을 익히는 과정 중심의 학습방법을 마련하고, 실생활과 수학의 연관성을 높이며, 학습량과 난이도를 제한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교육과정을 고치기만하면 ‘수포자’ 문제가 자동으로 해결되는 걸까요? 아무리 학교에서 원리와 개념을 익히는 과정 중심의 학습방법을 마련하고 실생활과 수학의 연관성을 높이더라도 수포자를 양산하는 근본원인, 즉 ‘선발적 교육관’을 개선하지 않는 한 이 문제는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사교육을 더욱 부추겨 우리 교육의 병증을 더욱 악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선발적 교육관’은 교육 과잉을 부르는 대표적 원인이다. 선발적 교육관은 ‘과정이야 어쨌든 시험으로 뽑기만 하면, 떨어진 사람들은 할 말이 없다’는 식으로 편익에 사로잡힌 왜곡된 교육관으로 무한경쟁을 유발하여 아이들에게서 행복한 삶을 앗아가고 있다. 같은 해에 태어났다는 것 때문에 같은 지식을 같은 시기에 학습하고, 같은 해에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발달이 느린 아이에게는 폭력과도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구조를 혁신하기 전까지 개인은 무력할 수밖에 없다”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가 발 딛고 있는 현장에서 최선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상반된 주장 속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저자는 “어느 한편의 주장만으로 교육 문제를 극복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구조와 개인을 필요에 따라 분리하거나 통합”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단 논의의 차원을 구분해야 합니다. “파행적 입시경쟁, 과잉 사교육, 교육격차의 심화, 교육 시장화” 등은 국가적 차원의 개선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한편, “학교환경의 개선, 학교 민주주의 실현, 교사의 전문성 신장, 주입식 암기교육의 극복, 학생인권의 보장” 등은 “학교 차원의 혁신 과제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리당략에 좌우되지 않는 우리 교육을 꿈꾸며     


논의의 차원을 구분한 후에는 효과적인 실천방안을 모색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 교육의 개혁이 어려웠던 이유는 제도의 혁신과 개인(들)의 혁신이 서로를 불신하거나 방해하는 형태로 진행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이는 전통적으로 제도의 혁신이 주로 진보적인 교육자들의 이슈였던 반면, 개인의 실천은 보수적인 교육자들의 이슈였다는 데에 기인합니다. 한편으로는 이제껏 교육이라는 영역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해왔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교육은 ‘정치’를 필요로 하지만 ‘정치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개인(들)의 혁신을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제도의 혁신은 장기적인 안목과 사회적 합의, 그리고 광범위한 인적・물적 지원이 없다면 공염불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교육은 ‘정치’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정치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이와 다릅니다. 우리 교육의 병증이 이렇게 깊어진 것은 교육을 도구화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일이 반복되어 왔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정권을 잡으면 가장 먼저 교육부터 손을 본다. 가장 먼저 대상이 되는 것이 국가 교육과정과 대학입시 제도이다. 당연히 온 나라가 혼란에 빠진다. 학교와 교사는 물론이고 학생, 학부모 할 것 없이 그 매뉴얼을 익히기 위해 소모적인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교육감, 교육부 장관이 바뀌거나, 대통령이 바뀌면 도로아미타불 식이다.”     


다시 말해 정치력을 발휘하여 안정적인 교육정책을 추진해야 하는데 그러지는 못하고 오히려 당리당략에 따라 정치적으로 악용되어 온 것이 우리 교육의 뼈아픈 역사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교육은 어떤 정치를 필요로 하는 것일까요? 함영기 선생님은 이를 위해 크게 세 가지를 제안하고 있습니다. 첫째, 민주시민 역량의 강화. 둘째, 교육 공공성의 회복. 셋째, 국가 교육위원회의 설치가 바로 그것입니다.     

 

“국가교육위원회는 존경과 신망을 받는 사회 각계각층의 인사들과 전문가로 구성되는 의사 결정 단위이다. 여기서는 적어도 20년 앞을 내다보는 ‘대한민국 장기 교육비전’을 만들어 내고 중장기 교육개혁 정책을 구상해야 한다. 지금의 교육부는 ‘교육지원부’로 전환하여 시도교육청과 학교 위에 군림하고 징계협박이나 하는 곳이 아니라, 현장의 어려움을 살피고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국가 교육위원회의 성패는 대한민국의 민주시민 역량에 달려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자의 말대로 좌든 우든 진영의 논리가 아닌 교육본질에 입각한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한 때입니다. 정치로부터 독립된 교육기구의 설치를 통해 교육 공공성을 회복하고 교육의 안정성과 지속성을 담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선발적 교육관’은 교육 과잉을 부르는 대표적 원인이다. 선발적 교육관은 ‘과정이야 어쨌든 시험으로 뽑기만 하면, 떨어진 사람들은 할 말이 없다’는 식으로 편익에 사로잡힌 왜곡된 교육관으로 무한경쟁을 유발해 아이들에게서 행복한 삶을 앗아가고 있다.



함께 읽는 책 No. 02

함영기(2014), 『교육사유』

함영기(2014), 『교육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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