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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상혁 Mar 25. 2016

오늘 처음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길을 헤매고 있나요? 그럼 잘하고 계신 거에요!

함께 읽는 책 No. 13

안준철(2012), 『오늘 처음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안준철(2012), 『오늘 처음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좋은 교사가 되기 위해 사랑하지 마라


오늘 처음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표지에 적힌 책의 제목을 읽으면서 제가 처음 교단을 밟았을 때의 당혹감과 설렘이 떠올랐습니다. 아직 그 여운이 가라앉지 않은 가운데 선생님께 이 글을 올립니다.


선생님의 글 한 편 한 편이 모두 주옥같아서 구체적인 언급을 하는 것 자체가 실례인 것을 알지만 지면의 성격상 양해해주시리라 생각합니다.


“고백하자면 나는 좋은 교사가 되기 위해 아이들을 사랑한 적이 있었다. 목적이 좋은 교사가 되는 것이었고, 그 수단으로 아이들을 사랑했다는 얘기다.”


좋은 교사가 되기 위해 사랑하지 마라. 꼭 저에게 하시는 말 같았어요. 아무래도 교사이다 보니 가끔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제 이야기를 들으신 분들이 한결같이 "선생님 같은 분을 학창시절에 만났더라면!" 이라는 감탄을 하시는 거에요. 그럼 한 편으로는 으쓱하면서도 이런 생각이 드는 거죠.


‘내가 묘사한 교실 속의 아이들도 이분들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고백하건데 자신이 없어요. 솔직히 그렇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어쩌면 그건 단지 나 스스로가 덧씌운 아름다운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생들과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성숙한 교사와 미성숙한 학생이라는 고정관념 속에서 그럴듯한 미담을 만들어 내려고 해왔던 것은 아닌지 깊이 반성했어요.


선생님께서 스승의 날 특집 방송에 출연했을 때의 사연을 전해주실 때는 저 역시 큰 위안을 얻었습니다. 방송 사회자가 선생님께 새내기 교사가 교직 생활을 하는 동안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도록 노하우를 전수해달라고 말했을 때,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물으셨다고 하셨죠. “아이들 만나는 것이 많이 힘들어요?” 그러고는 “예 조금요. 아니, 많이요.”라고 고백하는 새내기 교사에게 이렇게 조언을 주셨지요.


“그럼 잘하고 계시는 거에요. 저는 오히려 선생님이 좀 더 길을 헤매셨으면 해요. 너무 빨리 지름길을 찾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 역시 아이들을 만나는 것이 항상 어렵습니다. 벌써 교직 18년차가 됐는데도요. 아직도 헤매고 있는 것 같고요. 그래서 그 말씀이 꼭 저에게 하시는 말씀 같았어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균형 잡기


선생님이 정직을 가르치자 어떤 학생이 “선생님은 현실을 너무 몰라요”라고 비웃었다는 사연도 무척 인상 깊었어요. 교육자로서 “무엇이 옳은지는 알아요. 하지만 어디 현실이 그래요?”라는 말을 들을 때만큼 가슴이 턱턱 막히는 때는 없을 거에요. 하지만 선생님은 그런 ‘현실’을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어처구니없는 것은 그런 현실적이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들이 현실을 잘 아는 사람인 양 행세할 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 눈에 정직한 사람은 현실을 모르는 사람일 뿐이다”


결국 교사는 현실을 모르는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되지만 현실에 안주하는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된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을까요? 사실 현실론에도 두 가지 – 보수적 현실론과 진보적 현실론 - 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보수적 현실론은 이런 거죠. 능력주의와 진화론의 최전선에서 육상경기의 코치와 같은 역할을 교사가 해야 한다는 것. 한편으로는 정반대적 의미로의 현실론도 있어요. 지금과 같은 입시제도와 학벌주의 속에서는 어떤 교육도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결국 공교육 안에서는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양 극단 속에서 교사의 정체성은 극도의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지요. 


결국은 교육 그 자체에 대하여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선생님. 교육이란 무엇일까요? 그러고보니 선생님께서 책의 첫 장부터 던지신 질문이 떠오릅니다. 


“아이들을 어떻게 만날 것인가?”


학교도 결국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곳이지요. 그렇다면 교육도 교사와 학생이 어떻게 만날지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학생에 대한 두 가지 신화 - 순수한 아이들 vs 완전한 인간 - 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배움이 오직 학생에게서만 일어난다는 착각만큼이나 더 이상 교사의 가르침은 없다는 단정도 어리석은 일이지요.


에필로그에 이런 구절이 있더군요.


“교사로서의 내 꿈은 제자들과 참다운 우정을 나누는 것이다. 또한 그들이 ‘사랑의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내가 아이들을 사랑하듯 아이들이 그들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제자들과 참다운 우정을 나누는 것이 가능할까요? 생각해보니 질문 자체가 틀렸네요. 가능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저는 세상 속에서 참다운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학생들과도 우정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학생들도 마찬가지일거구요. 


많은 사람들이 교육 불가능을 이야기합니다. 통계적으로 볼 때 그 의미는 명확합니다. 우리 교육 속에서 희망의 근거를 찾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니까요. 하지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있듯이 국지적으로 볼 때 교육은 언제나 가능합니다. 선생님의 교실처럼요. 이제는 진부한 표현이 되어버렸지만 “지구적으로 사고하고 지역적으로 실천하라”는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강령은 ‘교육 가능한 사회’를 위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이곳에 일 년 간 소개해온 ‘함께 읽는 책’을 함께 읽고 나누는 것이 지구적 사고를 위한 것 중의 하나라고 감히 말씀드린다면, 지역적 실천은 바로 나의 학교, 나의 교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요? 


오늘 마지막으로 교단을 밟은 당신.
선생님의 정년퇴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정표의 뒷면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이정표가 뒤돌아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앞만 보고 달려가고 있을 때
길을 잃은 사람을 위해 멈추어 되돌아보는,
그 사람이 바로 교사이다”



이정표의 뒷면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이정표가 뒤돌아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앞만 보고 달려가고 있을 때
길을 잃은 사람을 위해 멈추어 되돌아보는,
그 사람이 바로 교사이다



함께 읽는 책 No. 13

안준철(2012), 『오늘 처음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안준철(2012), 『오늘 처음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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