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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상혁 Dec 09. 2015

영혼 없는 사회의 교육

희망은 어떻게 오는가

함께 읽는 책 No. 11

이계삼(2009), 『영혼 없는 사회의 교육』


이계삼(2009), 『영혼 없는 사회의 교육』



영혼 없는 사회대한민국


2004년 6월 23일, 김선일 씨가 이라크에서 살해당한 날 아침, 이런 날에도 아이들 앞에 서서 수업을 해야 하는가하며 서글퍼하고 있던 국어교사 이계삼은 김선일 씨의 참수 동영상을 ‘구경’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큰 충격을 받습니다. 끝 모를 참담함 속에서 그는 문득 루쉰의 ‘환등기 사건’을 떠올립니다. 일본 유학시절, 러시아 스파이로 체포된 중국인이 처형되는 장면이 나올 때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성을 내지르는 일본인 학생들 사이에서 침묵하는 중국인 중의 하나였던 루쉰. 그 사건을 계기로 의학공부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광인일기>를 통해 ‘영혼 없는 시대’의 자화상을 그려낸 루쉰의 처지에 동병상련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지금 우리 교육이 뭔가 근본적으로 크게 잘못되어 있다는, 그리고 아이들의 내면세계가 심각하게 황폐해져버렸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우리사회를 ‘영혼 없는 사회’로 명명하면서 지금의 우리 사회가 루쉰이 고발했던 ‘광인일기’ 속의 사회와 뭐가 다르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을 이렇게 만든 우리 교육의 속살을 낱낱이 까발리고 있습니다.     


“지난 100년 동안 이 땅에서 이루어진 교육은 결국 아이들로 하여금 ‘사람을 잡아먹게끔’ 맹렬하게 가르쳐 키워 세상에 내놓은 것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한 상황은 이 책이 세상에 나온 지 6년이 지난 지금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악화일로를 걷고 있습니다.      


“대개의 한국 고등학교는 반교육적이면 반교육적일수록 인정받는다. 교육행정관청이 부과한 최소한의 기준도 무시하고 반칙을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그리하여 진정한 의미의 교육활동을 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그 학교는 ‘열심히 하는 학교’로 인정받는다.”     


미래의 성공이라는 명목 하에 오늘의 삶을 저당 잡는 학교. 안으로의 성장이 아닌 겉으로 보이는 성과에 목매다는 학교. 성과를 위해서라면 반칙과 불법도 아랑곳하지 않는 학교. 그리고 그러한 반칙과 불법의 작태를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세상에 알린 교육자를 보복징계하는 학교. 이러한 세상 속에서 공부를 하는 학생들의 “혼이 정상”이 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영혼 없는 사회가 학생들의 영혼마저 잠식하고 있습니다.    

 


희망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유토피아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희망을 갖고 있다.”     


이반 일리치의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영혼 없는 사회의 교육>은 이계삼 선생님이 아직 자신의 고향인 밀양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시절에 쓴 책입니다. 그러니까 이 책은 765 킬로볼트의 고압 송전선과 송전탑이 고향 어르신들이 평생을 일구어 온 대지 위를 무자비하게 관통하기 이전에, 이치우 할아버지의 죽음과 유한숙 할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하기 이전에 쓴 책입니다.     


“‘누군가의 머리’ 속에서 나와서 ‘누군가에게 이렇게 해 보자’는 것이 유토피아라면, ‘자신의 마음’에서 나와 ‘자신이 이렇게 해 보려 하는 것’이 희망”이라는 이반 일리치의 말을 인용하면서 저자는 희망이라는 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합니다.      


“희망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그러므로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를 말하기 이전에, ‘우리들 자신이 어떤 인간이 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인 것이다.”     


저자는 본의 아니게 (지금도 끝나지 않은) 밀양 송전탑 문제의 대변자처럼 되어버렸지만, 사실 그가 10년이 넘게 자신의 젊음과 열정을 바쳐온 교단을 떠난 이유는 다름 아닌 ‘교육’에 있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체제 바깥으로 탈출하고 싶으나, 그 바깥은 낭떠러지일 것이라 믿고 있는 ‘불안’과 ‘공포’가 이 거대한 낭비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그것을 우리는 ‘교육불가능’이라고 이름 붙였다. 우리는 이 체제의 바깥은 낭떠러지가 아니라, 실은 온갖 교육적 가능성이 넘실거리는 신천지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바깥을 넘겨다보는 노력 그 자체가 성장이며, 해방의 담론이 될 수 있으리라 믿었다.”

- 이계삼, <혁신학교는 답이 아니다>      


교육은 “사람을 만드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만들기 위해 만들어놓은 체제가 제 구실을 못한다면 체제를 바꾸어야 합니다. 체제를 바꿀 수 없다면 체제를 버려야 합니다. 바깥으로 나가야 합니다. 바깥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러므로 나는 흙의 신앙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이들을 흙으로 되돌려놓지 않고서는 그들의 불안과 좌절은 출구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인간 정신이 온전하게 존립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가난’, ‘결핍’ 그리고 ‘힘없음’이라고 믿는다.”     


이후에 그는 덴마크의 정신적 스승이자 교육 사상가인 그룬투비의 ‘삶을 위한 학교’를 주목하게 됩니다. 그리고 충남 홍성의 풀무학교를 돌아보며 ‘기도’와 ‘노동’이라는 화두를 얻게 됩니다. 학교의 존재 이유를 묻게 되는 교육 불가능의 현실에서 ‘인문학’과 ‘농업’이라는 ‘쓸모’가 없는 것들의 ‘가치’에 대하여 주목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그가 절박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구하라.”     


“4천년 이래 항상 사람을 잡아먹어온 곳, 거기서 나도 오랜 세월 살아왔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다. … 4천년 동안 사람을 잡아먹는 이력을 짊어지고 있는 나로서는, 처음에 참다운 인간을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똑똑히 깨달았다. 한번도 사람을 잡아먹어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 어딘가에 아직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들을 구하라.”


루쉰, <광인일기>



미래의 성공이라는 명목 하에 오늘의 삶을 저당 잡는 학교. 안으로의 성장이 아닌 겉으로 보이는 성과에 목매다는 학교. 성과를 위해서라면 반칙과 불법도 아랑곳하지 않는 학교. 그리고 그러한 반칙과 불법의 작태를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세상에 알린 교육자를 보복징계하는 학교. 이러한 세상 속에서 공부를 하는 학생들의 “혼이 정상”이 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영혼 없는 사회가 학생들의 영혼마저 잠식하고 있습니다.  



함께 읽는 책 No. 11

이계삼, <영혼 없는 사회의 교육>

이계삼(2009), 『영혼 없는 사회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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