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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네 Apr 22. 2016

택배와 세인고

2015.3.1

오늘은 나에게 아주 특별한 날이다.

엄마가 택배를 보내줬다.
우리 엄마는 택배 보내기만 9년째 하고있다. 그런데도 엄마의 짐싸기 실력은 늘지 않는 것 같다.
오늘도 역시나 보내주기로 했던 물건들보다, 말하지 않았던 물건들이 더 잔뜩 들어있다.
보내주기로 했던건 서양미술사 전공서적 2권, 독서대, 비상약 몇 가지였는데_ 박스를 뜯어보니까 키친타올 한 뭉치(한 세트도 아니고 한 뭉치), 무식하게 큰 바디로션, 말린 표고버섯(응?), 암웨이 치약, 김, 대추차, 포도즙, 다신멸치, 그리고 겨울 다 지나서 왜 보냈는지 알 길이 없는 조끼패딩까지 '더' 들어있다. (다 필요없다 사실) 예전에 누구였더라, 연차애들중에 하나가 우스갯소리로 '신혜네 집에는 생필품 빼곤 없는게 없어, 다있어.'라고 했었는데 그 말이 더 확고히 자리잡는데 엄마가 한 몫 했다 오늘.



예전에 세인고 다녔을 때, 우리 모두는 그렇게 택배아저씨를 기다렸다.
군인들이 여자친구에게 올 편지와 택배를 기다리는 마음을 십분 이해? 도리어 그 군인들은 우리 마음을 반도 모를거다. 배송이 몇 일 더 걸린다는 그 '도서 산간' 지역이어서, 그 몇년 전에는 다른 택배회사들은 거의 우리 학교를 '배송 불가'지역으로 뒀었고, 그나마 로젠택배랑 우체국 택배가 유일하게 택배 배송을 해주었던걸로 기억한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다. 부모님들이 택배를 보낸 날 부터, 정말 운이 좋으면 하루였고, 이틀 삼일은 다반사였다. 특히 10월부터 눈이 와서 이듬 해 5월까지 눈이 오는 거의 강원도 수준의 산속이어서, 행여나 눈이라도 오는날은 택배가 도착하지 못하면 어쩌나 1교시부터 걱정을 해야하는 날이었다.

우리 택배의 90%는 우체국택배 기사님이 담당 해 주셨었는데, 항상 3교시가 끝나기 10분전쯤 오셨다.
그래서 마치 우리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기다리는 아이들마냥 3교시가 끝나면 택배가 왔는지, 편지가 왔는지 확인하는 낙으로 3교시 쉬는시간을 보냈다. 3교시 수업을 하다보면 택배기사님이 택배 트럭 문을 여닫는 소리가 난다. 그러면 그때부터 우리는 절대 수업에 집중할 수 없다. 게 중에 혹시나 친구나 부모님한테 손편지라도 온 친구들은 가장 부러움의 대상이었고, 복도에서부터 자랑을 하고 다녔다. (아빠한테 편지받았다고 자랑하던 남희가 갑자기 기억난다)


엄마가 혹시나라도 택배 보냈다고 연락을 하면, 그 다음날부터 도착하는 그 날까지 3교시마다 택배를 확인하러 중앙현관을 들락날락했다. 부모님이 보내준 택배는 나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었기 때문에, 귀엽게도 중앙현관에 나갔던 친구들이 자기 반 친구 이름이 적힌 상자라면 망설임도 없이 대신 신나게 가져오곤 했다. 물론 그런 문화를 알았던 부모님들은 항상 친구들과 나누어 먹어도 부족함이 없게 가장 큰 박스에 가득하게 먹을것을 넣어주었다.


그리고 택배의 주인공과, 같이 방을 쓰는 사람들은 그날 밤 아무도 도서관에 내려가지 않는 날이다.
왜냐하면 전체소등을 할 때까지 숨죽여 기다렸다가, 자치위원 언니들이 방 마다 다녀가고 나면, 그때부턴 사감선생님 몰래 스탠드 불빛을 켜고, 그 불빛마저 새어나갈까봐 수건까지 뒤집어 씌운 뒤, 새벽까지 택배 간식을 까먹어야 하는 '방 모임'의 날이기 때문이었다. (여기에다가 몰래 사감실에서 빼돌린 핸드폰으로 멕시카나까지 시키면 그날은 겹경사)



택배 메뉴중에 가장 환영받는 것은 단연코 라면이었다.
우리 학교에서 가장 귀한 음식이었다. 군인들은 px라도 있지만 우리는 그런 흔한 슈퍼조차도 없었고 동네 구멍가게가 전부였는데, 그 구멍가게 마저도 콜라나 라면도 유통기한을 확인하고 사야하는 수준이었고, 일단 평일에는 무조건 학교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나마 있던 주말 외출은 무조건 부모님에게 전화걸어 담임 선생님께 바꿔드려 외출 허락도 받아야 했었다. 겨울에는 멧돼지 때문에 7시 이후론 운동장 밖으로도 못나가게 마을방송을 그렇게 해댔다.
다음은 과일. 하루 삼시세끼 급식만 먹다보면 가장 생각나는게 '신선한 과일'류랑, 볶은 고기가 아닌 '구운 고기'였다. 사실 주말마다 당직선생님들이랑 고기구워 먹었으니까 그건 어떻게든 충족이 되는데 정말 과일은 귀했다. (이렇게 쓰다보니까 무슨 가난했던 1960년대를 회상하는 할머니같다)
그리고나면 이제 시중에 파는 과자류, 군것질 류, 같은 것들이었는데, 편의점도 뭣도 없는 그 곳에서 그런 간식은 정말 우리에게 가뭄의 단비같은 존재였다.

여름이면 택배 절반은 물러터지고, 상해서 왔는데 그게 그렇게 마음이 아팠다. 상한채로 와서 어쩔 수 없이 버려야 할 때면, 아까운게 문제가 아니라, 괜히 바쁜데 일일이 장봐서 택배 짐 쌌을 엄마아빠 생각에 미안하고, 엄마아빠가 보고싶은 마음에 몰래 찔끔 울면서 버린적도 있었다. (순진했네)
겨우 화요일 목요일에 단 4시간씩만 돌려주던 핸드폰으로 '택배 잘 받았다'고 연락을 해 줄 수 있었는데, 차마 상해서 버렸다고 말을 할 수가 없어서 '너무 맛있어서 친구들이랑 벌써 다 먹었다'라고 거짓말을 했다. 아마 세인고 친구들 중에 나만 그러지는 않았을 것 같다.


지금보면 참 대단한 부모님들이었지 싶다.
일주일에 세 번씩, 단 한번도 빠뜨리지 않고 180명의 전교생이 먹을 건강한 야식을 만들어 주셨던 우리네 어머니도 많이 생각나고, 또 다음으로 간식들을 매일 가져다주시던 한솔이네 어머니도 생각난다.
혼자 공부할거라고 방학동안에 집에 안 내려가고 대전의 고시원엘 들어갔었는데, 대전에 사는 친구 어머니가 먹을것들을 바리바리 싸다 주셨고, 필요한게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하라고 당부까지 하셨었다.
그리고 입시때문에 한창 면접을 보러 다닐때면, 학교에선 합법적(?)으로 하루 전 날 그 지역에 사는 친구들 집에 가서 인사드리고 함께 자고, 다음날 부모님들이 면접장소까지 데려다 주는 그런 따뜻한 재미가 있었다.


부모님들은 우리를 기억하려고 애썼고, 이름들을 대부분 외우고 계셨다. 우리는 그분들에게 자식 친구들이 아니라 '우리 애들', '우리 자식들'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우리는 부모님들을 아줌마 아저씨라고 불러본 적이 없다. 항상 어머니, 아버지라 불렀고 정말 우리 부모님처럼 다 같이 생각했던것 같다.
친구네 부모님이 간혹 학교에 놀러오시는 날에는 정말 우리 엄마아빠가 온 것 마냥 가서 앞다투어 인사하고 부모님들 앞에서 수다떨기 바빴던 기억이 난다.



오늘 내가 이 할일 많은데 문득 이렇게나 길게 일기를 쓰는 이유는, 특히나 오늘은 주찬이네 어머니께서_ 요즘 내가 집에서 밥도 못해먹고 다닌단 소리를 전해들으셨다며(허허) 아침에 식사 대용으로 들고 나가라고 모찌를 한그득 주찬이 편으로 전해주셨기 때문이다. 진짜 우리 세인고 엄마들은 감동이고 사랑이다. 사랑이란말은 이럴때 써야하는거라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 주찬이는 나에게 모찌가 담긴 봉지를 급하게 건네주면서 '목 막히면 먹어'라면서 내가 좋아하는 카누 스틱들을 또 한 움쿰 손에다 쥐어주고 바로 사라졌다. (조금 귀여웠음)
몇 주 전에는 어머니께서 또, 신혜 혼자 사는데 김치도 못먹을거라며 그 먼 산본에서 주찬이더러 김치를 가져다 주라고 하셨었는데, 요즘 김치는 커녕 집에서 밥도 할 수 없는 일정이므로, 김치를 못 받은것을 내심 감사하고있다. 정말로 주찬이가 김치까지 가져다 줬으면, 어머니가 힘들게 담근 귀한 걸 나는 제대로 먹지도 못해 상하기만 했을거다. '어머니한테 진짜 감사하다고 전해줘'라고 했는데, 정말 내가 마음속으로 감사해 하는만큼 전부 전해졌을지는 모르겠다.


내가 주찬이 어머니한테 이런 챙김을 받는 것 처럼, 우리엄마는 포항에서 밥을 사주겠다며 기쁨이랑 서로를 챙겼었다. 참 신기한 구조다. 남들은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정말로 우리가 '세인가족'이란 말을 썼던 그 느낌을 이렇게 9년이 지난 지금도 온 몸으로 느끼고 있다.


하여튼 세인고에서 물건을 구하기가 힘든 점 때문에, 혹 필요할지 모르는 물건들을 다 넣고 택배를 보내던 그 습관이 고스란히 담긴 엄마의 택배와, 먼 곳에서 주찬이 통해 무겁게 보내주신, 그것도 직접 만든 모찌를 보니 기분이 괜스레 좋아져서 이 기분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어서 오랜만에 일기를 썼다.
이번 주 내내 정말 고단했고, 그리고 앞으로 또 이틀간 매우 힘들겠지만, 이 순간들을 잘 이겨내고 힘내라고 보내 준 선물같이 느껴져서_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또 작업을 하게 되더라도 기분 좋게, 그리고 감사함으로 보내는 하루가 될 것 같다.


이제 그만 일도 마무리 하고, 눈 좀 붙이고나서 내일 눈 뜰 때, 기쁨과 감사로 눈을 뜨는 하루가 되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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