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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질서 속의 질서, 인도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보셨나요

인도 횡단보도 앞, 시간이 멈춘 10분

by 화자

인도 방문을 앞둔 지인이 나에게 무언가 가장 ‘인도스러운 것’을 추천해 달라고 한다면 나는 그저 인도의 횡단보도를 건너보라고 말할 것이다. 인도 향신료가 물씬 풍기는 근사한 음식, 화려한 인도문양으로 둘러싸인 호텔을 기대했다면 지인은 내 대답을 듣고 꽤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느낀 인도는 값을 지불해야 향유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닌 그냥 길거리에 있었다.





횡단보도를 앞에 두고 10분을 그저 서있었다.
도무지 언제 발을 내딛어야할지 몰랐다.



처음 5분은 인도의 길거리를 테마로 한 다큐멘터리를 시청하는 마음으로 우뚝 서 있었다. 인도에 오기 전 관련영상으로 학습한 바에 따르면 거리에 소가 많다고 하던데.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소는 없었다. 우리 할머니댁 거리에 소가 더 많을 것 같았다. 역시 인도라 하더라도 수도는 다른 건가. 노후 경유차 진입을 금지하는 서울과 같이 , 대기질 오염방지를 위해 소 출입금지 규제라도 만든 것일까.


경적소리가 백색소음이 되는 순간.


시끄러웠다.

적당한 소음이면 시끄럽다고 인상을 찌푸릴 텐데 어느 역치를 넘었나 보다. 제각기 다양한 음색을 뽐내는 경적소리가 일순간 아득해지고 백색소음이 되었다. 인도에서는 경적의 용도도 다른가보다. 여기서는 경고의 목적이 아닌 내 차의 ‘존재를 알리는’ 목적으로 경적을 울리는 듯했다. 한국에서는 잠잠한 공기를 가르는 쨍한 경적소리에 흠칫 놀라거나 도로에 어떤 상황이 펼쳐졌는지 경적이 울린 곳으로 고개를 돌린다. 하지만 여기서는 고개를 돌릴 필요가 없다. 놀랄 필요도 없다. 대기에 눅진하게 깔린 먼지만큼이나 도로 좌우에 자욱하게 깔린 차들이 어린아이들이 재잘대듯 목소리를 높일 뿐이다.


아차, 아직 건너지 못하고 있었다.

인도의 도로를 관람하느라 여태 횡단보도를 건너지 못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신호가 없는 도로였기에 적당히 도로가 비는 타이밍을 노리려 했으나 그런 건 이 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엔 무언의 관습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횡단보도를 중심으로 왼쪽 차량들과 오토바이 떼가 우르르 먼저 지나가고, 그다음엔 오른쪽 차량들과 툭툭이들이 우르르르. 이후엔 내 차례라고 생각하며 좌우 차량들에 눈짓해보았으나 그냥 좀 신기한 외국인에게 눈길 한 번 주곤 그저 꿋꿋이 갈 길을 가기 바빴다.


그렇게 툭툭이들과 차량 떼가 또다시 우르르르르르르.




마침 걸어 다니는 인적이 드문 곳이어서 현지인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는데, 아침운동 나온 차림의 백인계 외국인 아저씨가 내 어깨를 두드리더니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그다지 길진 않은 횡단보도에서 멍하니 서있는 작은 친구가 조금 측은해 보였 나보다. 인도 거주 경력이 있어 보이는 든든한 뒤태에 홀리듯 따라갔다.


백인아저씨는 한 손을 위로 뻗어 허공을 내젓더니 질주하는 차들 속으로 바로 진입했다. 아 아찔한데. 지금이 아니라면 영영 그 횡단보도를 관람하고만 있을 것 같아서 어설프게 아저씨의 행동을 따라 하며 뒤따랐다. 끊일 줄 모르는 경적소리가 아까완 달리 괜히 신경쓰였다. 하지만 그 일상적인 경적은 홍해를 가르려는 우리를 향한 것이라곤 할 수 없었다.


여전히 경적을 시끄럽게 울렸지만 놀랍게도, 정말 놀랍게도 차들은 속도를 조금 줄이며 아저씨와 내가 지나갈 순간을 마련해 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우리의 걸음이 지난 자리를 곧바로 다시 질주했다. 갈치가 바다 위로 튀어 오르듯, 파리채를 용케 피한 파리가 윙 - 질주하듯, 차들은 틈새를 놓치지 않고 달린다. 내 걸음의 보폭이 만약 여기서 1초라도 예상한 속력과 다르게 지연되거나 빨라진다면 큰일이 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큰일이 나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무질서 속의 질서. 인도의 횡단보도를 건너보세요


바닷가에서 고사리 손으로 어렵게 만든 모래성을 밀려드는 파도로부터 지켜본 적 있는가. 작은 손으로 파도를 막아보겠다고 거대한 파도에 맞서 모래성 주변으로 손을 둘러보지만, 무심한 파도는 고사리손 곳곳의 모든 틈새를 파고든다. 이 차 떼들이 마치 그 파도와 같았다. 거스를 수 없는 불가항력같이 밀려드는 차 떼들에게 나는 그저 내 보폭의 예상속력을 알려주고 알아서 비켜가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건 마치 도로의 차들과 함께하는 오케스트라 합주 같기도 했다. 이 합주에는 굉음을 내는 트럼펫 밖에 없다. 나는 진도 4.8의 규모로 마구 진동하는 트럼펫들 속에서 언제 현을 한번 뜯어볼지 고민하는 하프 연주자 같았다. 트럼펫이 수적으로나 데시벨으로나 압도적이긴 하지만 하여튼 하프와 트럼펫의 합주이긴 했다. 그 횡단보도를 건너는 내가 그랬다.


어떻게 건넜는지 모르게 용케 홍해를 가른 뒤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나에게 백인아저씨는 함께 건너온 나사 빠진 동료에게 싱긋 웃으며 가던 길을 갔다. 멀어지는 아저씨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아직 채 여운이 가시지 않은 방금 전 횡단보도에서의 몇 초를 곱씹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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