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이랑 오뎅은 빼주세요."
동네 김밥집에서 김밥 한 줄을 사먹는 정도로 가끔 탈주(?)를 하는 날이 있다. 고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찾아오는 허기를 조심해야 한다. 당장 먹을 수 있는 손에 잡히는 메뉴를 찾다 보니 일삼게 되는 타협이다. 그럼에도 내 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기 위하여 햄과 오뎅은 뺀다. 평소 고기도 피하는 마당에 가공육을 먹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오뎅은 튀긴 데다 밀가루 성분이 있기에 뺀다. 오뎅이 튀긴 음식이라는 것도 최근에 인지했다. 그저 생선이 주성분인 괜찮은 메뉴인 줄로만 대충 알았다. 라면도 치킨도 '튀긴' 음식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이 정도로 철저히 무관심, 무지했다. 그저 막연히 안 좋은 음식, 어쩌다 가끔씩은 먹어도 되는 음식인 줄로 여겼다. 음식의 성분 뿐만 아니라 조리법까지도 잘 들여다봐야 한다. 내가 먹는 음식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부족했던 만큼 몸은 죽지 않을 정도로 고생을 했다. 그렇게 수십 년을 무분별하게 먹고도 아직 살아 있다는 건 전적으로 삶이 베푼 관용 덕분이다.
나의 식단을 궁금해 하는 질문이 있었다. 대답 대신 질문자가 오늘 하루 동안 먹은 음식들을 되물어보았다. 된장찌개, 나물, 빵, 닭고기... 얼핏 봐서는 별 문제 없어 보이는 식단이다. 다 듣고 나서 대답을 했다. 그 중에 내가 먹을 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나에겐 무얼 먹느냐보다 무얼 먹지 않느냐가 더 중요하다. 그럼 대체 먹는 게 뭐냐고 그런다. 이것저것 다 안 먹고 어떻게 사느냐는 거다.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 내 편에선 상대방의 이런 반응을 늘 예상하고 있다. 그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는 그가 나를 이해하지 못함을 이해한다. 나는 다만 질문에 답할 뿐 상대방의 이해를 구하지 않는다. 나의 식단을 상대방에게 요구하지도 않는다. 나는 나의 식사가 너무 만족스러울 뿐. 그리고 나의 식사는 나의 삶을 만족하게 한다.
오늘의 첫 식사도 샐러드 한 접시였다. 모두 살아 있는 음식들이었다. 음식을 먹었다기보다 충분한 생명력을 내 몸에 공급하는 느낌이었다. 빛깔 고운 형형색색의 채소와 과일들을 한데 모아놓으면 보는 것만으로 힐링이 된다. 골고루 여러 종류를 먹을 땐 한 가지만 맛보았을 때와는 다른 상승 효과가 일어나면서 그 조화로운 맛이 나에게 큰 행복감을 준다. 소화시키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먹고 나면 속이 편안하고 몸이 무거워지는 일이 없다. 발걸음도 가볍게 일터로 출발.
날씨가 추워지더니 본격 감기의 계절이 되었다. 출근하자마자 앞뒤 좌우로 들려오는 콜록 소리.. 감기 환자가 속출하고 있다. 그 중 한 명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기에 대화를 시도해본다. 혹시 평소 즐겨 먹는 음식이 무엇이냐고. 상대의 대답 속엔 예상했던 대로 유제품을 비롯한 가공식품, 기름진 음식들이 즐비했다. 추워서 감기에 걸리는 걸까? 추워도 누군 걸리고 누군 걸리지 않는다. 감기는 정화를 위한 자연치유 과정이다. 몸 속이 깨끗이 정화된 상태면 감기는 할 일이 없어 머쓱해진다. 나는 이 원리를 따라 감기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롭게 되었다. 예방접종을 맞으러 가는 분주한 행렬에 더 이상 동참할 이유가 없어졌다. 나만의 예방법이란 누차 말해왔듯이 자연에 가까운 깨끗하고 건강한 식단과 적정량의 식사다.
예전엔 저항력이 약했기 때문에 감기 환자 옆에 가는 것이 상당히 두려웠다. 그러다 내가 가장 중증 환자가 되어 피골이 상접해지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독하고 끈질기냐고 떨어지지 않는 죄없는 감기를 원망했다. 감기에 걸렸으니 더 잘 먹어야 한다며 이것저것 마구 먹어대기 바빴다. 당연히 감기가 오래갈 수밖에. 하지만 이제는 감기 환자들에게 사방팔방 포위를 당해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혹여라도 감기 기운이 조금이라도 감지되면 그것은 내 현재 건강 상태를 알려주는 신호가 되기에 곧바로 조치에 들어가면 그만이다. 자연치유에 걸리는 시간은 경험상 하루 이틀 정도면 충분하다. 만일 내가 이 대유행의 시기에 감기에 걸리게 된다면 치유를 위해 가장 먼저는 그 동안 내가 무얼 먹었는지 최근 것부터 식단 역추적에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이내 그 원인은 얼마 전 김밥 한줄과의 타협이었음을 밝혀낼 것이다. 하지만 감기를 피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햄이랑 오뎅은 빼주세요."란 요청 덕분일 것이다. 감기는 우리에게 물어올 것이기 때문이다. 좋다는 무엇을 먹었느냐가 아닌, 혹시 먹지 않으면 좋았을 무엇을 먹은 건 아니냐고. 다행히 나는 아직까지 감기의 이 날카로운 질문을 잘 비껴가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