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 김치를 아는가. 나는 김치를 몰랐다. 김치가 이렇게 특별한 것이었나. 본격 식단관리를 하게 되면서 어떻게 하면 김치조차 끊을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냉장고에 마저 남은 김치를 다 먹어치우는 날만을 기다렸다. 벼르고 별렀던 김치와의 작별을 선포할 참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한국인으로서의 김치를 향한 귀소본능 DNA가 내 안에도 심겨져 있는 모양이다. 막상 김치가 똑 떨어지자 김치를 사려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거리는 나를 발견했다. 김장철이 다가오자 누가 김치라도 담근다는 얘기만 들어오면 귀를 쫑긋거리며 군침을 흘렸다. 그리고는 한없이 부러워했다. 나는 김치를 담글 줄 몰랐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더 이상 본가에서 김치를 가져다 먹을 상황이 아니었다. 김치를 끊든지, 무에서 유를 창조하든지 해야 했다. 한국인의 본능을 못 이겨 결국 후자를 선택했다.
김치에 대한 타는 목마름(?)으로 자급자족을 위해 김치의 기본 재료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오직 김치를 담글 목적으로는 난생 처음으로 배추라는 물건을 영접했다. 젓갈이라는 것을 구해왔다. 양념으로 쓸 이것 저것을 냉장고에서 닥치는 대로 파내기 시작했다. 세상 귀찮아 보이던 풀 쑤기라는 것도 해봤다. 잡히는 대로 전부 때려넣고 갈아 양념이라는 것을 탄생시켰다. 때깔이 썩 그럴싸 해보였다. 그런데 배추라는 놈이 만만치 않았다. 결코 우습게 볼 녀석이 아니었다. 처음엔 절이는 데 참패를 했다. 밤새 절여놓고 의기양양하게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삽시간에 해치우리라 기대 만빵이었으나 웬걸, 자기 전에 분명 팍 숨이 죽었던 녀석들이었는데 뚜껑을 열자마자 두 배로 부활해 있는 배추들이 밭으로 서로 뛰어가겠다고 난리였다. 난 배추의 생명력이 그토록 끈질긴 줄 처음 알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한 번 칼을 뽑은 이상 이대로 물러설 내가 아니었다. 소금을 더 팍팍 쳐서 이번엔 확실히 손봐주리라.
김치에 대해 일자무식인 내가 보기에도 대충 이 정도면 된 것 같다 싶을 즈음, 절여진 배추를 손질하여 야심차게 준비한 양념장에 투하했다. 쓱쓱쓱쓱 버무려 갈수록 잘은 모르지만 뭔가 내가 알던 김치의 모양새를 점점 갖추는 듯 보였다. 모든 것이 감이요, 눈대중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일단 맛을 봐서 합격이면 된 것 아닌가. 한 점 입 안에 넣고 맛을 보니... 오... 이번에도 역시 뭔가 내가 알던 김치의 맛깔이 났다. 먹고, 또 먹고.... 음... 모종의 역사가 일어나긴 한 것 같았다. 꽤 괜찮았다. 나만 괜찮은 건 아닌가 의심스럽기도 해서 지인에게 시식을 하도록 했다. 오... 의외의 리액션이 나를 고무시키기에 충분했다. 같은 김치를 다음 날 다시 먹어보았다. 사실 요즘은 아침에 눈만 뜨면 김치가 궁금해서 야단이다. 오늘은 어떤 맛일까. 어떻게 변했을까. 뚜껑을 열어 김치의 풍미를 감상한 뒤, 공복임에도 성질 급하게 한 점 먹어보았을 땐, 속쓰림에도 불구하고 어제보다 조금 더 깊은 맛을 내는 김치가 신통방통하기만 했다. 김치는 펄펄 살아숨쉬는 생명이었다.
점점 김치의 매력에 빠져들고 있다. 어떻게 하면 최고의 김치를 담글 수 있을까. 맛도 좋고 건강에도 좋은. 단순한 음식이 아닌 약으로 승화시킬 수는 없는 것일까. 하루 종일 그 생각 뿐이었다. 이 사람 저 사람의 비법을 검색해봤다. 그리고 영감을 주는 비법들을 짬뽕시켜 엑기스만 모아 나만의 새로운 레시피를 탄생시키기 위한 청사진을 머릿속에 끊임 없이 재생시켰다. 그리고 그걸 토대로 또 한 번 재료들 수집에 나섰다. 이번엔 처음에 했던 것처럼 손에 잡히는 대로 대충 때려넣는 게 아니라 심혈을 기울여 하나하나 고르는 작업을 거쳤다. 가장 맛있다고 소문난 것들을 찾기 위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 최대한 집중력을 발휘해 하나하나 모든 과정을 거치리라. 배추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맛과 건강을 동시에 잡는 양념의 기본기는 무엇인지, 김치의 저장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러한 본격적인 김치 작업의 서막이 이제 곧 열리려 한다. 이런 두근거림, 이런 설렘은 김치만이 줄 수 있는 것으로 처음 느껴보는 새로운 삶이다.
김치... 허구헌날 먹었던 김치. 먹을 줄만 알았던 김치. 김치가 과연 무엇이길래 김치 하나 내 손으로 담그기 시작했을 뿐인데 내 삶에 이토록 강한 동기부여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김치 하나로 삶이 이토록 아름답게 느껴질 수 있단 말인가. 김치 담그는 것을 그저 고된 노동이라고만 여기지 않았던가. 하루하루가 김치를 담글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신나고 즐겁다. 김치는 특별한 요리다. 손끝에서 피어나는 김치는 나와 자연의 합작품이다. 이토록 멋진 동역이라니. 김치 자체도 생명의 도가니이지만 김치 담그는 사람까지도 생명으로 충만해진다. 처음으로 김치통이라는 것을 사봤다. 남들이 담글 때 침만 꼴깍 삼키며 부러워하던 김치가 이제 내 수중에 있다고 생각하니, 더 이상 비싼 돈 주고 김치를 사러 이리 저리 기웃거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냉장고에 가득 들어찬 김치통만 봐도 왠지 부자가 된 것처럼 든든하고 푸근해진다. 이 정도면 적어도 나에게 김치는 이미 보약이 된 것이나 다름 없다. 김치에는 맛 이상으로 삶을 치유하는 힘이 있는 것임에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