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딸 둘을 키운다. 첫째는 7살, 둘째는 5살. 아마 첫째가 어린이집을 다닐 때였다. 어린이집 공지사항에 체험학습 날짜와 준비물이 적혀 있다. 그중에 가장 크게 보인 단어는 도! 시! 락!이라는 단어였다. 그래도 좋은 아빠가 되보겠다고 호기롭게 던진 한마디가 그날 이후로 날 아이들의 체험학습 전담 도시락 메이커로만들었다
" 애들 도시락은 내가 챙길게."
이때는 이게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 일인지 감을 잡지 못했다. 자취 내공 12년의 짬밥을 발판 삼아 도시락쯤이야 뭐 간단하지?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며 던진 한마디였다. 그날 이후로 아이들은 체험학습, 소풍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우리 첫째 아들은 "아빠 도시락이 제일 맛있어", "아빠가 도시락 싸줄 거지?"를 외친다.
한 번은 학교 회식 다음날 체험학습이 있었다. 코로나 전이라 회식이 빈번하던 시절 술을 한잔 거나하게 하고 집에 들어오는 길에 김밥 거리를 사들고 집에 온 기억이 난다. 그때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얼른 해야지 생각했지만 숙취로 힘든 아침에 김밥을 싼다는 건 정말로 매우 고단하고 힘든 하루의 시작이었다. 단순히 아이들의 체험학습 도시락을 책임진다는 의미는 도시락을 싼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이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나의 스케줄과 컨디션까지 고려하여 아이들에게 맞추겠다는 선언이었다.
나의 사랑과 관심의 결정체
코로나 이후 나의 야간 스케줄은 많지 않다. 거의 대부분의 일정은 금요일에 몰아놨기 때문이기도 했고 되도록 아이들 체험학습 도시락을 싸야 하는 날에는 다른 일정은 잡지 않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다.
요즘에는 둘째 딸이 도시락 노래를 부른다. 체험학습 안내가 된 2주 전부터 날 보며 아무 말 대잔치를 하다가 나오는 문장이 있다.
" 아빠, 나 다음 주에 딸기 따러 갈 때 아빠가 도시락 싸줄 거지?"
" 아빠, 도시락 뭐 싸줄 거야?"
" 아빠, 나 다음 주에 딸기 따러 갈 건데 도시락 누가 싸줘? 아빠가?"
문장의 패턴만 다를 뿐 아빠 도시락 싸!라는 말을 참 다양하게도 표현하는 우리 따님이시다.
아침 알람 소리에 겨우겨우 눈을 비비고 일어나 자기 전에 준비해둔 재료들을 꺼내 후다닥 김밥을 말기 시작한다. 겨우 김밥을 말아서 칼로 자르고 도시락에 담는 게 전부인 일이지만 바쁜 아침시간에 출근시간을 맞추려면 항상 시간이 빠듯하다. 과일도 챙겨야 할 것 같아서 방울토마토 씻고, 천혜향 하나 까서 담아주니 겨우 도시락이 완성된다. 아이들 마실 음료에 이름표 붙이고 과자는 락앤락 통에 담으니 오랜만에 아이들 유치원 가방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다.
오늘 체험학습을 다녀온 손에는 딸기 한팩과 딸기 케이크가 들려있다. 아내가 아이들에게 한마디 한다.
" 아빠가 해준 도시락 다 먹었어?"
딸이 대답한다.
" 응, 너무 많아서 다는 못 먹었어. 근데 맛있었어" 맛있었어?라는 말을 물어보진 않았지만 끝에 꼭 붙이는 딸이다. 아들이 대답한다.
" 김밥도 다 먹고, 과자도 다 먹고, 과일도 다 먹고, 음료수도 다 먹었어."
아들은 직접 가방을 열고 텅 빈 도시락 통을 보여주며 나를 보고 씩 웃는다. 이 맛에 도시락을 싼다. 좋은 아빠 되기 어렵지만 할만은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