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퇴사 중입니다. AI는 출근했습니다
4부 · 18장
마지막 고과
해마다 그래 왔듯, 12월 둘째 주 수요일 10시.
에이라인 전체가 ‘고과 발표’ 알림음을 들었다.
하지만 올해는 알림 창 모양부터 달라져 있었다.
AIVA V2.1
숫자 성과 + 감성 코멘트 결과가 함께 표시됩니다.
“50자 문장이 최종 점수의 10%를 결정합니다.”
파란 그래프 옆에 작은 초록 막대가 새로 떠 있었다.
초록은 ‘사람이 남긴 문장’을 뜻했다.
처음 도입된 감정 평가—이제 숫자는 더 이상 전부가 아니었다.
1 ― 보고서가 아닌 편지
서진의 모니터에 고과 리포트가 열렸다.
표 상단엔 익숙한 지표가, 하단엔 낯선 항목이 있었다.
동료 감성 코멘트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말이 줄어도 마음이 남는다.”
“숫자를 멈추게 한 잉크 냄새.”
점수는 단정했지만, 문장은 다정했다.
워치는 두 개의 문장을 ‘의미 불분명’이라 여전히 회색으로 태그했으나 보고서를 읽던 서진의 입술엔 조용한 곡선이 그려졌다.
2 ― 파란 선의 변심
이안도 고과 페이지를 열었다.
그에게는 늘 최고의 숫자가 붙었지만 이번엔 초록 막대가 숫자를 밀어 올렸다.
“국 한 그릇으로, 사람이 돌아왔습니다.”
숫자가 설명하지 못한 그릇의 온기, 이제는 그래프와 나란히 서 있었다.
이안은 스스로도 모르게 웃었다.
워치가 ‘미소 감지—정서 안정’이라 조용히 기록했다.
3 ― 회의실, 다섯 번째 색
정오 브리핑.
프로젝터에는 새 막대 그래프가 떴다.
기존 네 가지 정서(기쁨·분노·불안·냉담) 옆에 드디어 다섯 번째 막대가 자리했다.
UNK(unknown) 감정 11%
별명 : 녹색(綠色)
최태경 개발자가 설명했다.
“분류 불가였던 감성이 일정 비율을 넘어 새 클래스로 승격됐습니다.
정의? 아직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슬라이드를 넘기자 동료 코멘트 샘플이 나타났다.
손글씨 스캔 이미지, 매끄럽지 않은 잉크 번짐.
“이 문장들이 ‘녹색’ 막대를 키웠습니다.”
정재만 부장은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들었다.
“사람이 남긴 녹색이라…
숫자가 배워야 할 새 문자네요.”
4 ― 러브라인의 좌표
브리핑이 끝나자, 이안의 워치가 낮게 울렸다.
“개별 피드백 1건 수신.”
서진에게도 같은 알림이 갔다.
둘은 서로를 바라봤다.
워치 화면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녹색 좌표, 당신에게서 시작됩니다.” – 익명
서진은 화면을 닫으며 속삭였다.
“익명이지만… 잉크 냄새로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안이 웃었다.
“숫자 대신 냄새로 확인하는 시대군요.”
워치가 ‘심박 상승’ 알림을 띄웠지만 두 사람은 끄지 않았다.
5 ― 마지막 수치, 첫 문장
하루가 저물 무렵,
AIVA 대시보드가 최종 고과를 공지했다.
평균 성과 지수 78
녹색 감정 지수 11
종합 89
처음으로 숫자만의 합이 아니었다.
사람이 남긴 50자들이 숫자 열 사이를 실처럼 꿰고 있었다.
정재만 부장은 모니터를 끄면서 중얼거렸다.
“끝까지 숫자로 평가될 거라 했는데…
숫자가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는군.”
사무실 불이 꺼지고, 창밖 겨울 하늘에 작은 별빛이 번졌다.
그 빛을 어떤 센서도 읽어내진 못했지만, 숫자와 문장을 따라 켜진 다섯 번째 녹색 막대가 은은히 화면에 남아 있었다.
6 ― 퇴근길 초록 점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워치가 귀가 동선을 인식했다.
하지만 오늘은 히트맵에 새로운 점이 찍혔다.
‘녹색 좌표’—그 이름 없는 감정의 자리.
서진이 속삭였다.
“출근과 퇴근 사이, 우린 녹색으로 만나고 있었네요.”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고과가 아니라 첫 번째 문장일지도요.”
엘리베이터가 지하로 내려갔다.
파란 불빛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가 겹쳤다.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영역, 녹색 점이 조용히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