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퇴사 중입니다. AI는 출근했습니다
4부 · 19장
출시
서울 도심, 새로 지은 ‘에이라인 타워’ 외벽은 유난히 반짝였다.
전광판 한 면을 통째로 차지한 흰 배경 위에 단 한 줄 문장이 떠올랐다.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밑에는 작은 로고와 날짜.
— AIVA 2.1, 오늘 정식 공개.
도로를 지나는 사람들은 잠시 고개를 들었다.
화려한 3D 애니메이션도 없는 정적(靜的) 광고.
하지만 심박계처럼 또렷했다.
1 ― 런칭 쇼케이스
건물 12층 컨벤션홀, 프레스 라이트가 켜지자 개발팀장이 발표를 시작했다.
“우리는 오늘 AIVA에 다섯 번째 감정 클래스를 탑재했습니다.”
모니터엔 녹색 막대가 천천히 늘어났다.
시演(시연) 화면에서는 동료 코멘트가 실시간으로 초록 글씨로 떠올랐다.
“국 한 그릇으로, 사람이 돌아왔습니다.”
“숫자를 멈추게 한 잉크 냄새.”
기자들이 속삭였다.
“이거… AI가 생성한 거야?”
도연이 객석 뒤에서 웃었다.
만약 기자들이 몰랐으면, 문장은 다시 사람의 것이 되는 걸까?
팀장은 마이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건 ‘사람이 남긴 50자’가 AI를 다시 배우게 한 사례입니다.”
2 ― 손글씨와 QR 코드
발표 막바지, 윤서진이 무대에 올랐다.
손에는 낡은 메모장 한 페이지.
페인트칠하듯 잉크가 퍼졌지만 문장은 여전히 또렷했다.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이 문장을 캡처하세요.”
그녀가 카메라를 향해 말하자 뒤편 스크린이 확대되었다.
OCR 모듈이 글씨를 읽어 들였고, 바로 아래 새 태그가 나타났다.
소스 : Handwriting
감정 : 녹색 — 분류 완료
기자석이 술렁였다.
“손글씨도 데이터화?”
서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데이터화가 아니라, 데이터가 비켜 간 자리에 남은 기록입니다.
AIVA는 이제 그 흔적을 ‘잡음’이 아닌 ‘증거’로 저장합니다.”
3 ― 거리의 작은 혁명
쇼케이스가 끝난 지 한 시간,
도심 곳곳 전광판에는 한 줄 문장과 초록 막대 로고가 번갈아 떴다.
지하철 내부 스크린엔 AIVA V2 광고가 아닌, 직원들의 50자 코멘트가 무작위로 흘렀다.
“같이 웃으면, 숫자는 잠깐 멈춘다.”
“방패 같은 맛이었습니다.”
“녹색 좌표, 당신에게서 시작됩니다.”
승객들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워치는 ‘미소 감지’라 조용히 기록했다.
숫자는 웃음을 여전히 효율로 환산했지만 이제 효율 속에 작게, 녹색 별표(*)가 붙었다.
4 ― 내부 메신저, 초록 물결
사내 채널에도 새 놀림이 돌았다.
“녹색 급여 기대합니다!”
“50자 베스트 코멘트 상 부탁.”
정재만 부장은 그 농담을 읽으며 임시저장함 없는 이메일을 처음으로 삭제했다.
이미 보낸 고발이 아닌, 이제는 동참의 시간이었으므로.
그는 전 직원 공지를 올렸다.
“이달부터 감성 코멘트는 고과 점수보다 먼저 읽겠습니다.
그래프가 마음을 따르도록.”
알림 푸시가 파도처럼 번졌다.
워치는 ‘군집 발화 → 긍정’ 태그를 달았다.
5 ― 밤섬 위의 불빛
해 질 무렵,
이안과 서진은 회사 옥상에 섰다.
이제 옥상은 더 이상 빨간 점이 아니라 초록 점으로 표기된 구역.
A-TAG 워치가 그 변화를 표시하며 낮게 진동했다.
“창의 모드 ON.
녹색 감정 로그 활성화.”
서진이 웃으며 물었다.
“숫자로 인정받은 최초의 ‘잡음’이네요.”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출근도 퇴근도 녹색 좌표를 지나가겠죠.”
두 사람의 워치 화면에 새 코멘트를 남길 수 있는 빈 칸이 떴다.
하얀 백색, 50자 제한.
서진이 먼저 펜을 꺼냈다.
이번에도 손글씨였다.
“출근과 퇴근 사이,
당신이 남긴 잉크 냄새.”
이안은 키보드로 답을 적었다.
“녹색 좌표,
숫자를 잠깐 멈춘 자리.”
엔터를 치는 순간 도시 전광판 한곳이 동시에 초록 별표를 띄웠다.
밝은 별을 하나 찍듯, 밤섬 위 공기가 조용히 흔들렸다.
숫자는 여전히 셀 수 없는 것들을 놓치고 있었지만 그 빈 칸마다 사람들은 문장 하나씩을 심기 시작하고 있었다.
‘출시’라는 말이 생산 개시를 의미하기보다 새 언어의 싹을 틔우는 계절처럼 들리던 밤,
파란 불빛 아래 작게 숨 쉬는 녹색은 더 이상 잡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