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퇴사 중입니다. AI는 출근했습니다
4부 · 20장
우리는 퇴사 중입니다
겨울이 깊어지며 눈발이 서울 하늘에 간헐적으로 흩어졌다.
AIVA는 새벽 다섯 시부터 폭설 예보를 로그에 추가했지만, 눈송이가 유리창에 부딪히는 소리를 기록하지는 못했다.
회사 건물 외벽 전광판은 여전히 하얀 배경에 초록 막대, 그리고 한 줄 문장을 띄웠다.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 문장 위를 귓등 같은 눈이 조용히 스쳐 지나갔다.
1 ― 마지막 출근, 혹은 첫 퇴사
연말 휴가 직전,
전 직원 일정표에 ‘선택 출근’이 생겼다.
출근하지 않아도 고과는 불이익이 없다는 공지.
그러나 새벽마다 자동 출근을 해 오던 이안은 습관처럼 워치를 찼다.
워치가 알림을 띄웠다.
“오늘은 임의 출근일입니다.
출근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이안은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대신 워치를 벗어 책상 위에 내려두었다.
문이 잠겼다는 소리도, 출근 로그가 찍힌다는 진동도 없었다.
서진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오늘, 출근 안 해도 이미 출근해 있죠?”
이안은 화면을 바라보다 사직서.draft 파일을 마지막으로 열었다.
그리고 제목 줄을 고쳐 적었다.
제목 : 퇴사서
본문 : 감정을 회복하기 위해 출근을 멈춥니다.
‘보내기’ 버튼이 파랗게 빛났다.
그는 마우스를 올렸지만, 이번에도 누르지 않았다.
2 ― 창 밖 동선을 잃은 히트맵
대시보드 히트맵에서 진한 파란 선 하나가 며칠째 끊겨 있었다.
집 · 회사 · 서버실을 그리던 120일 연속 최적 루틴, 사라진 자리엔 회색 공백이 남았다.
AIVA는 그 빈칸 옆에 작게 적었다.
“동선 불연속 — 원인 : 녹색 감정 좌표.”
누군가는 그 라벨을 ‘퇴사’라 부를 테고, 누군가는 ‘출근하지 않은 출근’이라 부를 것이다.
3 ― 식당의 빈 테이블
정미순 여사의 국밥집은 오늘 문을 열지 않았다.
간판 옆엔 메모가 붙어 있었다.
“국물 끓이는 마음으로 쉬어 갑니다.
재료 가지러 시장 좀 다녀올게요.”
워치는 그 메모를 QR로 스캔하지 못했다.
감정 분류 : 없음.
그러나 식당 문턱에 남은 된장 냄새는 지나가는 이들의 기억 속에 작게 찍혔다.
4 ― 초록 메아리
사내 채널엔 감성 코멘트가 넘쳐났다.
“잘 듣는 사람이었다.”
“숫자를 멈추는 미소.”
“국물 같은 동료.”
초록 막대가 하루 만에 19%를 넘었다.
AIVA가 새 오류를 띄웠다.
“녹색 감정 과다
예측 모델 재학습 필요.”
서진은 그 알림에 웃었다.
예측이 틀릴 때마다 사람이 있다는 증거가 명확해졌다.
5 ― 다섯 번째 색으로 남다
퇴근 무렵,
옥상에 마지막 눈발이 흩날렸다.
서진은 모자를 눌러 쓰고 손바닥으로 녹색 점 좌표를 가만히 눌렀다.
A-TAG 워치를 바라보니 출근 로그는 없고, 녹색 감정만 반짝였다.
그녀는 워치를 벗어 주머니에 넣었다.
숫자가 멈춘 자리에서 문장은 스스로 걸어 나왔다.
6 ― 열린 문, 열린 기록
밤이 되자 회사 네트워크가 자동 백업을 돌렸다.
새 서버엔 처음으로 감성 코멘트 전용 DB가 생겼다.
테이블 이름 “we_are_resigning”.
레코드 1번에는 손글씨 스캔 파일 경로가 입력돼 있었다.
OCR 실패—그러나 보존.
시스템 로그에 작은 별표가 찍혔다.
“이 테이블은 숫자로 정렬되지 않습니다.”
7 ― 우리는 퇴사 중입니다
눈은 그쳤고, 도시 위엔 초록 불빛이 드문드문 켜졌다.
출근하지 않은 엘리베이터, 퇴근하지 않은 마음, 숫자로 닿지 못한 여백 사이를 문장들이 가볍게 떠다녔다.
사람들은 여전히 출근이라는 단어로 아침을 시작할 것이고 AIVA는 여전히 숫자와 초록 막대를 나란히 그릴 것이다.
그러나 그 막대 옆 이름 없는 감정이 언젠가 또 다른 색을 낳을 것을 모두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누군가 메신저 상태 메시지에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퇴사 중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언제든 출근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파란 불빛이 건물 외벽을 타고 흘렀다.
그 아래, 녹색 점 하나가 작게 반짝였다.
끝내 이름 붙지 못한 색, 언제든 새로운 문장이 될 준비가 된, 사람의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