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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세호 Mar 18. 2020

상실의 시대

딸기 쇼트케이크를 던진다면

  

2017 오타루에서 먹은 딸기 쇼트케이크


  생크림 속에 층층이 딸기가 박힌 케이크가 두 입거리 크기로 남았다. 나는 몸을 기울여 그릇에 입을 가져가 한입에 케이크를 밀어 넣었다. 눈 앞에 투피스 정장을 입은 종업원과 눈을 마주쳤기 때문이다. 종업원이 나에게 다가와 과잉친절을 베풀기 전에 친구에게 손짓으로 나가자고 말했다. 내가 굳이 따분한 클래식이 흐르고 레이스 장식이 주렁주렁 달린 카페에 들어가 케이크를 먹은 건, 이곳은 일본 오타루고 얼마 전 ‘상실의 시대’를 읽었기 때문이다.


마음대로 하는 것, 가령 내가 선배에게 딸기 쇼트케이크를 먹고 싶다고 하면 말이에요. 그러면 선배는 모든 걸 걸 집어치우고 그걸 사러 달려가는 거예요. 그리고 헐레벌떡 돌아와서 "자 미도리 , 딸기 쇼트케이크야"’ 하고 내밀겠죠, 그러면 "흥 이따위 것 이제 먹고 싶지 않아’ 그러면서 그걸 창문으로 휙 내던지는 거예요’ 내가 바라는 건 그런 거란 말이에요.

-상실의 시대  中에서



  축하노래를 부르고 촛불이 꺼지지 무섭게 냉장고 속에 처박히는 프랜차이즈 빵집의 케이크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딸기 쇼트케이크는 특별하게 맛있었다. 오타루의 어둡고 적막한 거리에서 나는 생각했다. 미도리 같은 여자가 내가 애써 사온 특별한 케이크를 눈앞에서 던진다면 난 어떻게 반응할까? 나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저따위 케이크쯤 갑자기 싫증 날 수 있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통장엔 천만 원이 있고, 내 안에는 아직 피우지 못한 재능이 있다고 믿었다. 그 재능은 애정결핍인 여자를 안아줘도 남을 만큼 크고 특별한 재능이라고 생각했다.


  3년이 지났다. 올해 나는 처음 읽을 책을 ‘상실의 시대’로 정했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그냥 카페에 손님이 없었고, 겨울비가 왔으며, 창가에 성에가 생겼었다. 책을 읽다 그때와 같은 구절에서 나는 전과는 다른 생각을 했다. 미도리 같은 여자가 내 앞에서 케이크를 던진다면 나는 상기된 얼굴로 노려보고 집에 갈 것이다. 그게 아니면 던진 방향을 확인하고 그곳으로 달려가 흙이 묻지 않은 부분을 주워 먹는 구질구질한 행동을 할 것 같았다. 3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내 안의 특별함을 상실했다. 아니다. 그렇게 믿었던 나를 상실했다.


  작년 한 해는 꽤나 버거운 시간이었다. 내 안의 마을에서 크고 작은 불길이 이렀다. 연기가 자욱한 그곳을 물조루 한 통을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불길이 느리게 정말 아주 느리게 꺼졌다. 그을린 채로 보도블록에 앉았다. 쥐고 있던 주먹을 폈다. 아마도 그때 나의 특별함도 불에 타 상실한 거 같았다. 타고 남은 재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빠져나갔다.


  이제 나는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적당히 무거운 박스를 나르고, 카페에서 평범한 커피를 손님에게 대접한다. 시간이 나면 글을 쓴다. 주말에 친구들과 축구를 하고 맥주를 마신다. 올해 서른하고 한 살을 더 먹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이렇게 상실하며 살아가는 걸 말하는 것 같다. 나는 지금의 삶에 만족한다. 다만 케이크를 던져도 웃으며 불구경을 할 수 있는 특별함을 품고 있었던 그때가 약간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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