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라는 말에 잠식되어 가던

by ㄱㄷㅇ

세 번째로 이른 장마가 시작한다. 여름의 초입이라기엔 더위가 만연하지만,

아직은 봄의 마음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바깥을 나서니 여름이 느껴졌다. 온도 때문이 아니라, 공기 속에 담겨 있는 분자가

여름의 향취를 느꼈기 때문이다.


이른 장마가 시작된다는 뉴스를 보았다. 제주에서부터 시작되는 비가

점차 북상한다는 소식은 서울에서도 많은 비가 내릴 것이라고 했다.

비가 올 것이다. 무척이나 많은 비가 나의 여름을 관통할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비 맞는 걸 좋아했다.

한 여름의 불쾌 속에서 비를 맞으면 몸에 묻은 것들이 모두 씻겨 나가는 듯한 착각이 든다.

몸에 묻은 것들. 나를 파괴하는 갖가지 감정을 씻어 내는 것.

그 순간만큼은 어지럽던 생각이 잠잠해졌다.

차가운 빗줄기가 피부를 때릴 때마다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씩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빗속을 걷다 보면, 모든 것이 단순해진다.

남은 건 젖어가는 감각뿐이다. 차갑고 선명한 그 감각이 나를 잠시 붙잡고,


비가 오면 비를 맞는 것. 처럼 단순하게 살고 싶다.

좋으면 좋은 것, 싫으면 싫은 것. 하고.

복잡하고 얽히고설킨 삶을 풀어 그저 단순하게 누군가를 사랑하면 사랑하는 것으로,

실패하면 실패하는 것으로, 그렇게 끝나는 감각을 갖고 싶다.




설움이 북받치던 순간을 압니다

짧은 사랑과 길게 지속될 마음을 알기도 하고요,

이미 조각나버린 순간의 편린들을 어루만지기도 합니다

짧다고 깊지 않았던 것은 아니며

길다고 포기 못할 것도 아님을 압니다


우리가 처음 우리라고 불리던 날에

나는 우리라는 말을 한참 동안 속삭였습니다

그 단어 속에는
함께 걷고 싶었던 날들과
서툴지만 나누고 싶었던 마음들이 담겨 있었고,

적당히 간절했던 마음이
그 짧은 두 글자 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잊힐까 두려운 마음을 아시는지.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라는 말이 점차 다른 결을 띄고,
그 처음의 마음마저도 흩어지던 순간
바라보던 시선, 조심스러운 손끝,
말하지 못했던 고백들이 그 안에 담겨 있었습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시간은 분명 나를 바꿔 놓았습니다.

나는 여전히 그 말을 속으로 천천히 불러봅니다.
우리.

아주 작은 단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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