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더 잔인한가
추석연휴가 끝나고 통곡한 사건 이후
우리는 말 없이 살고 있다.
밤에 설거지와 뒷정리를 다하고 자러가면
늦은 오후부터 일어나 놀고 있던 아들은
부시럭거리며 부엌을 뒤지며
먹을 거리를 찾는다.
그리고 밤새 유튜브와 인터넷을 보며
낄낄거리며 아침을 맞이한다.
2024년.. 우리에게 잔인한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결국 아이가 자퇴했다는 사실을
양가 집안에 알려야 했고..
그 소식이 일파만파 퍼진
추석명절은
아이를 잘못 키운 부모에겐
너무 잔인한 시간이었다.
우리 집안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네가 잘 키우고 있다 생각했는데..
어떻게 할거냐..
저렇게 두면 안된다..
걱정이라는 탈을 뒤집어쓴 말들은
잔인한 비수가 되어 내 속을 헤집어 놓는다.
잔인한 나날들이다.
대화하자는 부모에게
아이는 세탁바구니를 던지고 쌍욕을 퍼부었다.
그날 이후
나는 더이상 아이에게 밥도
챙겨주지 않고 있으며
일체 눈길도 주지 않고 있다.
아이는 여전히 방문을 잠그고 본인만의 세계에
빠져 지내고 있다.
누가 더 잔인한가 누가 더 못되먹었나
내기라도 하듯이
우리는 서로에게 잔인하다..
배고파서 부엌을 들락달락하는 걸 알면서도
모른척 방에 앉아 있는 엄마라는 나.
부모가 애타서 울고불고 하는 걸 알면서도
방안에서 밤새 놀고 있는 자식이라는 녀석..
우리는 잔인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누가 누구에게 더 잔인한가.
자식의 잘못을 품어주지 못하는 부모..
매일 잘못을 저지르는 자식..
거기다 입을 대는 주변의 사람들..
잔인함의 비수는
매일 내 마음속을 헤집고 다녀
피범벅과 눈물범벅으로 너덜너덜 해진지 오래다..
그 와중에 정신과 약은
나에게 숟가락을 들게 한다.
“입맛도 좀 도실 거예요..”
의사선생님의 말처럼
곡기를 끊어도 시원찮을 판에
나는 둘째 밥을 퍼주며
나도 모르게 숟가락을 들어 밥을 퍼먹고 있다.
아..정말 지독히 잔인하다.
나의 뇌속에서 호르몬을 조절시켜
이상황에서 밥을 먹게 하는
약의 효과 조차도
이보다 더 잔인할 수 없게 느껴진다.
누가 더 잔인한가.
“이제는 돌아와도 유급입니다.“
내심 반가운 마음으로 받아든 학교의 전화에도
잔인함이 흐른다..
누가 더 잔인한가..
이보다 더 잔인할 수 없는
영화같은 시간이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