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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프롤로그

사랑에 대한 프롤로그



사랑

꼭 죽을 만큼 사랑해야 말할 수 있는 걸까


나도 사랑하지 못하는데 ,
과연 내가 널 사랑할 수 있을까?



대다수의 사람들이 운운하는 사랑이라는 단어

광활하고도 또  때로는 소소하지만 여전히 어려운 것

충분히 사랑받고 싶다고 말하는 속에는  그 역시 충분히 사랑을 주고 있지 않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어있다.

사랑을 받고 있는지 혹은 아닌지 오늘 나는 어떤 기준을 바탕으로 결정 내릴 수 있는 것일까?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에서의 사랑은  정말로  죽기까지 사랑함 만이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 모두는  불완전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완전함을 입기 위해 살아가는  불완전한  존재들이다.

완전한 사랑을 얻고자 하는 우리의 몸부림



완전한 사랑은  이미 신이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죄가 없는 존재가 죄 있는 존재를 용서해 줌이

진정한 용서이고,  온전함 그 자체이신 분이

사랑을 할 때 온전한 사랑을 이룬다. 그래서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죄를  십자가에서 용서하시고  온전한 사랑을  이루셨다.





때때로 나는  이런 생각에 잠겼었다.  “난 부모에게 제대로 된 사랑을 받아본 적도 없고, 지금은 남편 또한  나를  사랑하지 않아”


이 얼마나 불행한 생각인가, 그때는 미처 인지하지 못했었다.  매일  우울증 아닌 우울증으로  눈물로 날을 지새우며, 가슴속  먹먹함을  늘  안고 살아야만 했었다.  어느 날이었다.  

상처의 근원지는 어디일까 하며 내게 던져온 질문에  난  생각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수없이 쏟아져 나오던  사람들의 이름과

상황과  기타  다른 것들.


그들과  그 상황이 없었다면  나는 행복했을까?

대답은 No 였다.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서도  

말속에서도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도

난  방어할 뿐만 아니라  행복할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나에게 그런  권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더  디테일하게 말해보자면 그렇다.

오늘 직장에서 누군가 나에게


“ 일을 왜 이렇게 밖에 처리를  못했어?

실력이 개판이구만 , 애초에 맡긴 내 잘못이지.”


라고 핀잔을 주었다면, 난  여전히 행복할 수 있을까? 억울하다거나  화가 난다거나 혹은 자존심이

상한다거나 자책이 들것이다.


그때에 그 감정들이 내 안에서 집을 짓지 못하도록

선택해 나가는 것이 삶에서  더 큰  행복 ,

사랑을 누리며 살아가는 비결이다.


여기서  모두는 불완전하다는 진리를

기반으로 생각하며 삶을 풀어나가면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 거기에  어떠한 감정

적인 요소들을 제하고 (감정적인 소통은 대부분

과장되거나 왜곡된 부분들이 많다)

fact 만을  점검해 수정해 나가면  좋다.




1. 사람은 모두 불완전하다.

2. 지금 이 시간의 주인도  내가  아니다.

3. 모든 상황과 관계는 하나님께서 나를

자라나게 하시기 위한  세팅이다.

4. 내가 그렇듯 상대도 불완전한 존재다

5. 불완전한 상황을 통해 완전한 그분을 찾게 하신다.





여기서 fact는  일의 진행에 있어  실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감정적인 모든 요소는 제하고 따져야 한다.  상대가 나에게 원하는 것은  잘못을 인정하고

시정하길 원하는 것이니 재빠르게 대응을 하면 된다.


부당하게 나에게 던진  감정적인 왜곡된 말들은  과감하게  던지고 , 저렇게 밖에 말할 수 없는  그의

삶의 가치관에 나를 부합시키려 노력하지 않아야 한다.



나에게 먼저는 관대해지는 것이  더욱  건강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되는 바탕이 된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나” 는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었던가 ,


이 세상에 어디에도 완벽한 사랑은 없다.  드라마나 영화, 웹소설에서나 접하는 플라토닉 한 , 아가페적 사랑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나마 비슷한 무리가 가족이라는 공동체이지만

사실  이 안에서도 사랑이라는 것이  지극히 나의 감정 안에서 주장되고, 순간순간마다  작은 미움과

다툼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랑이라는 이름 하에 가족 공동체 안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물론 요즘엔  그마저도 허락되지 않은

broken relationship들이 있기도 하다.






사랑은  내가 먼저 주는 것이다.



받아야만 줄 수 있다는 사고방식은 버리자. 사랑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다. 물리적인 것들은 그저 사랑을 전달하는 도구일 뿐이다.  물리적, 유기적 어떤 방법으로도 전할 수 있고 받을 수 있지만 결코 사랑을 모르기에 할 수 없다 라고 말하고 피할 수는 없다.




우리는 사랑을 줄 때에 비로소 행복해진다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사랑이 있다.
바쁜 일상에 지쳐 무심코 지나온
바람도 햇살도 내가 보지 못하고
지나온 땅위를 기는 개미 마저도
사랑이다.  고로 나는 사랑을  줄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앞으로
말해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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