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제주에 올 때마다 오름은 꼭 하나씩 오르곤 했다. 등산은 하고 싶어도 체력이 바닥이라서 엄두가 잘 안 나는데, 오름은 큰 부담 없이 오를 수 있어서 좋다. 보통 30분, 길어야 1시간 내외로 잡으면 충분히 오를 수 있고, 정상에 올랐을 때 느끼는 만족감도 꽤 크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제주의 멋진 풍경과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까지, 내가 들인 수고에 비해서 더 큰 보상을 받는 기분이다.
무엇보다 오름에는 아이들과도 함께 갈 수 있다. 오름마다 난이도가 다르긴 하지만, 6살, 4살 꼬마들이 충분히 갈 수 있는 곳도 제법 많다. '오늘은 어느 오름을 갈까?' 고민될 때는 박선정 작가님의 책 '오름 오름'과 '오름 오름 트래킹 맵'을 참고했다.
아이들과 첫 오름에 가다
4월의 어느 주말,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하는 첫 오름으로 '느지리 오름'에 도전했다. 엄마 뱃속에 웅크리고 있는 태아 모습과 비슷하다는 느지리 오름은 '오름 오름' 책에서 아이와 함께 갈 수 있는 오름으로 추천한 곳이었다.
아직 34개월인 2호 꼬마가 조금 걱정되긴 했지만, 평소에 에너지가 넘쳐흐르는 데다가 어릴 때부터 여기저기 데리고 다녔으니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오름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있었는데, 우리는 정상까지 바로 올라가는 가파른 길 대신 둘레길을 선택해서 천천히 올라갔다.
느지리 오름은 일단 사람이 많지 않아서 걷기 좋았고, 숲길도 아름다웠다. 올라가는 도중에 근처 목장에서 키우는 말도 볼 수 있어서 아이들이 좋아했다. 예상대로 2호 꼬마가 '힘드러워!(힘들어)'를 계속 외치긴 했지만, 그때마다 앉아서 물도 마시고, 쉬어가면서 조금씩 올라갔다. 막판에는 꽤 가파른 오르막길도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보면 아이들과 함께 가기에도 무난한 코스였다.
정상까지 오르니 작은 전망대가 나왔다. 아이들은 신나서 뛰어 올라갔고, 나도 뒤따라 올라가 보니 시야가 탁 트이면서 한라산도, 바다도 시원하게 잘 보였다. 연신 힘들다 외치는 2호 꼬마보다 고사리 따는데 정신 팔려서 자꾸 사라지는 아빠가 더 문제였지만, 아이들과 함께 한 첫 오름을 무사히 다녀올 수 있어서 뿌듯했다.
쉬어가도 괜찮아
첫 오름을 다녀온 이후로 자신감이 생기자, 다른 오름에도 계속 도전하기 시작했다. 노루생태관찰원에 간 날엔 거친 오름 둘레길 2.3km를 함께 걸었다. 어른에겐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할 수 있는 정도의 거리지만, 아이에겐 어떨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까지 스스로 걸을 수 있는지 궁금한 마음에 한번 같이 걸어보기로 했다. 아이들에게는 걷다 보면 야생 노루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더니 금방 넘어왔다.
아빠와 1호 꼬마는 노루를 부르며 저 멀리 앞서 나가고, 나와 짝이 된 2호 꼬마는 초입부터 '힘드러워!'를 외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드러눕는 타이밍이 빨리 찾아왔다. 아이가 바닥에 주저앉거나 드러누워도, 다른 사람들의 통행에 방해가 되지 않으면 그냥 편하게 쉴 수 있게 내버려 뒀다. 나는 아이가 쉬는 동안, 옆에 나란히 앉아서 기다렸다. 아이는 자주 힘들다고 이야기했지만, 조금 쉬고 나면 또다시 힘을 내서 걸었다.
절반쯤 걷다 보니 '힘드러워'가 '안아줘'로 넘어가는 다음 고비가 찾아왔다. 아이는 자꾸 안아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안아달란다고 다 안아주기엔 2호 꼬마의 몸무게가 또래에 비해 상당했고, 나에겐 오래 안아줄 체력도 없었다. 그래서 솔직하게 (미안하지만, 엄마도 힘들어서 널 계속 안아줄 수 없어) 얘기하고, 잠깐씩 안아서 달래주되, 다시 스스로 걸을 수 있도록 응원해줬다.
끊임없는 기다림의 연속이었지만, 2호 꼬마는 끝내 자기 발로 2.3km 둘레길을 모두 걸었다. 1시간이면 충분한 코스를 2시간 가까이 걸어도 평소와 달리 조급한 마음이 들진 않았다.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기 위해서 서둘러야 하는 상황도 아니고, 그저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온 건데 급할 게 뭐가 있나 싶었다. 게다가 아이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아름다운 한라산의 모습을 천천히, 마음껏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부지런히 걷는 데만 집중했다면, 충분히 음미하지 못했을 멋진 봄의 풍경이었다.
'지금'도 할 수 있어요
김소영 작가의 '어린이라는 세계' 책을 읽다 보면 신발끈 에피소드가 나온다. 어린이들은 어른처럼 빨리 신발끈을 매진 못하지만, '지금'도 혼자서 신발끈을 묶을 수 있다. 다만 어른보다 시간이 좀 더 걸릴 뿐이다. 내 눈에는 마냥 아기 같은 우리 집 아이들도 그렇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일들을 스스로 할 수 있다. 한 시간에 1km를 가더라도, 힘들어서 계속 쉬어가야 할지라도, 어찌 됐든 제 발로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다.
하지만 어른들은 아이가 스스로 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할 때가 많다. 나 역시 평소에는 아이의 속도를 기다리지 못하고, 빨리하라고 채근하고, 그래도 안되면 내가 대신해준다. 특히 어린이집 버스 시간이 다가온다거나 약속 시간에 늦을 것 같으면, 아이가 한없이 꾸물거리는 것처럼 보여서 속이 터질 것만 같다. 엄마도 사람인지라 그런 순간까지 평정심을 유지하며, 느긋하게 기다려주는 건 현실적으로 힘들다.
그래서 여유가 있을 때 아이와 함께 천천히 걷는 시간을 갖는 게 필요하지 않나 싶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아이의 속도와 리듬을 존중하면서 자연 속에서 함께 하는 시간 말이다. 편안한 마음으로 함께 숲 속을 걸을 때마다, 우리 아이들도 기다려주면 스스로 할 수 있다는 믿음이 내 안에서 조금씩 쌓이는 것 같다.
아직은 '시간 없어!', '빨리빨리!'가 수시로 튀어나오는 성격 급한 엄마지만, 언젠가는 아이가 스스로 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기다려주는 어른이 되고 싶다. 그날을 위해서 우리 가족은 주말이면 숲으로, 오름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