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변론
A가 저녁에 술 한잔 하자고 해서 약속을 정하고, 시간을 맞춰 약속장소에 나갔다. 성격탓도 있지만, 직업의 특성상 시간, 일정 등을 지키는 것이 몸에 베어 있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약속시간보다 10여분 일찍 약속장소에 도착한다.
상대방이 제 시각에 나오더라도 나는 10여분을 기다린 셈이다. 그 책임은 오로지 나에게 있을 뿐이기 때문에 상대방에 대한 원망은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약속시간이 지났음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약속 상대방을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어느 정도의 시간을 기다린 후 자리를 뜨면 약속의 상대방은 물론, 제3자가 보더라도 설득력있는 이해를 얻을 수 있을까.
지금은 휴대전화가 있어서 약속의 상대방이나 내가 늦더라도 그 상황을 상대방에게 알릴 수가 있고, 기다림의 부탁을 할 수 있다. 기약없이 기다리는 일 따위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다 와가. 다 왔어
약속장소에서 기다리는 입장에서는 시간이 더디게 흐른다. 지체하는 입장에서는 시간이 빨리 흐른다. 시간의 심리적 상대성 때문이다. 기다리다가 먼저 약속에 늦고 있는 상대방에게 연락을 하면 대부분 들을 수 있는 대답은, "다왔어. 거의 다왔어. 미안"이다.
과거 휴대전화의 보급이 미진했던 시절에는 약속 장소에서 하염없이 기다릴 수 밖에 없다. 상황을 수시로 전하고 들을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코리안 타임'이라는 관례나 관습같은 것이 있는 듯 하다. 약속시간으로부터 5분에서 10분 정도 기다리는 것은 마치 예의이거나 상대방에 대한 관대함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 정도의 시차는 너그럽게 넘겨 봐 줄 수 있는 일인 것이다.
하지만, 약속시간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일정을 조정하며 시간에 대한 인식의 끈을 놓지 않았던 시간 준수자의 노력은 어떤가. 비록 짧은 순간이지만 상대방의 여유나 일방적인 사정 때문에 허비되어 버린 시간 준수자의 시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시간임이 분명하다.
30분, 1시간. 약속에 늦고 있는 상대방을 얼마나 기다리면 대놓고 나무랄 수 있을까. 이런 식으로 따질 수는 없지만, 1시간을 기다렸다면 최소 시급 1만원의 경제적 손실은 보는 셈이다. 게다가 기다리는 과정 속에 허비된 정서적 에너지의 값도 있을 것이다.
보통 약속의 성격상 '을'의 지위에 가까울 경우, 약속시간에 늦는 경우는 드물다. '갑'의 지위에 가깝거나 대등할 경우, 약속시간보다 조금 늦는 것에 대해 스스로 관대해져 버린다.
나의 시간만큼 상대방의 시간도 소중하다는 것을 잊지말고, 어떤 약속이든 제 시각을 지키려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