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칼럼
피노키오는 인간이 되고자 했다. 그러나 꿈에서나 인간이 되었고 제페토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어떤 면에서는 인간이 되었다. 사실 피노키오 원작은 피노키오가 자살하는 것으로 매듭지어졌는데, 너무 과격하다고 하여 수정되었다. 자살이란 설정 자체가 인간임을 전제로 한 것이라는 사실을 오늘에서야 깨닫는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2001년 'AI' 라는 영화에서는 꼬마 AI가 진정한 아들로, 인간이 되고자 희망한다. 한 500년쯤 흘렀을까. AI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 결국 AI는 인간이 되다.
머신이 꿈을 꾼다는 것이 그 때는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서민석 부장판사님은 인공지능 판사에 관한 소견을 밝혔다(법률신문). 내가 속한 직업(법률가)도 곧 AI에게 자리를 내어 주어야 할 영역이라고 금일자 중앙일보에 실렸다. 제일 먼저 사라질 직업으로 은행의 창구직원이라고 하는데, 실제 은행원들 중 대다수는 ISA 통합계좌를 팔려고 혈안이 되어 있느라 변화하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 하는 듯 하다.
이어령씨는 "자율주행 자동차에 대해서는 두려워 하지 않으면서 왜 AI에 대해서는 두려워 하는가"라고 말씀하셨다. 참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말씀이시다.
인류는 육체가 덜 작동되는 방법을 고안해 내는 역사로 흘러왔다. 돌로 적을 무찌르는 시기에서 창으로, 활로, 총으로, 로켓으로 육체의 수고로움을 덜어주는 역사로 발전해 왔다. 하지만, 그것이 늘 반가웠을 따름이지 두려워 하지는 않았다.
편지를 발로 걸어 전달하다가 전기적 신호로, 이메일로, 화상으로 그런 식으로 물리적 거리를 소거하는 역사로 흘러왔다.
그러나, 그러한 고안물들이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던져 주지는 못 했다. 그래서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다. 컨트롤할 수 있으니 별다른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고, 그 고안물을 구입할 수 있는 머니만 벌어들이는 고민을 하면 되었다.
AI는 육체노동시장에 변화를 주는 것이 아니라 지식노동시장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변화를 줄 파문을 줄 수 있는 그런 존재다. 감히 AI에 대해 존재라는 말을 쓰고 싶지도 않았지만, AI는 실존임이 현실화되었다.
봉급날 치킨을 사 들고 집에 들어설 때 아버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구나라고 느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AI에게, 로봇에게, 머신에게 일자리를 내어준다면 치킨을 가족들에게 먹일 수 있을까.
AI가 전기를 공급하는 인간이 되고자 한다면 제페토처럼 헌신적으로 "너는 이미 인간이니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고 동화같은 말을 건넬 수 있을런지 의문이다. AI에게 "너는 인간을 웃게 만들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어야 해"라고 했는데, AI가 인간을 웃게 만들게 하기 위해 전기로 지져댄다면 어떻게 될까.
피노키오의 꿈은 해몽해야 할 그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