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변론
전화통화를 하면서 펜을 들고 메모지를 앞에 두고 있으면 통화가 끝난 후 형이상학적인 낙서가 빼곡하게 그려져 있는 경우가 있다. 기이한 도형과 나선 등을 왜 그리게 되었는지 합리적인 이유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낙서가 의식이 있는 가운데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낙서는 종이와 펜이 있어야 한다. 아날로그적이고 제한적 형식하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인 셈이다. 그러나, 낙서를 컴퓨터로 하지는 않는다. 컴퓨터로 낙서를 하면 낭비되는 종이나 잉크가 없음에도 낙서를 컴퓨터로 하지는 않는다.
결국 사람은 디지털이 해갈해 주지 못 하는 오감의 만족을 통해서 인간다움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다. 종이의 질감, 펜의 바삭거림, 시각적인 문자와 문양들은 사람에게 물질 자체, 행위 그 자체 이상의 의미를 부여한다.
디지털은 모든 것을 0과 1로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많은 것들이 생략될 수 밖에 없다. 시대에 뒤쳐졌다고 평가할 수 있겠지만 가끔은 구식이 좋을 때가 있다. 시간과 정성을 들여 직접 무언가를 행하고, 누군가를 만나는 일이 디지털에서 이루어지는 일 이상의 의미를 가져다 주는 경우가 많다.
디지털은 인간이 인간이기 때문에 갈망하고 만족을 추구하는 영역의 경계에서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비록 그것이 수고롭고 더 많은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은 디지털 밖의 세상과 유리될 수는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