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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평변호사 Apr 07. 2016

'똘', 상실의 경험

윤소평변호사칼럼

#1


1986년이었는지, 1987년이었는지, 초등학교 4학년 내지 5학년 무렵 '똘'이라는 잡종견을 기른 적이 있다. 두 눈 부위에 얼룩이 져 있고, 체구가 축구공 너비 정도였는데, 두 눈망울만큼은 또렷하니 영특해 보여서 '똘'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똘을 어릴적부터 집안에서 길렀는데, 함께 자고 방안에서 같이 생활하기를 몇 달하니 무럭무럭 자랐고, 학교를 다녀오면 그간 소변을 참은 것인지 너무 좋아하면서 꼬리를 흔들고 등을 깔고 누워 배를 보여주며 오줌을 지리기도 했다. 동생들과 나는 방과후에는 일정 시간 똘이와 시간을 보냈다.


#2


우리 가족은 당시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2층 양옥집중 2층으로 오르는 계단 부위 쪽방에서 생활을 했었는데, 아마 임차조건이 사글세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글세는 10달치 월세를 선납하고 보증금없이 주인의 집을 렌탈하는 제도이다.


임차조건에 대해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똘이를 떠나 보낼 수 밖에 없었던 사연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똘이의 몸이 커지자 마당에 내 놓을 수 밖에 없었는데, 집주인이 너무 싫어했다. 이유는 털이 날린다, 똥오줌이 더럽다, 짓는 소리가 듣기 싫다, 비위생적이다 등등 동물을 싫어할 수 밖에 없는 모든 사유를 늘어놓았던 것같다.




#3


그후 집없는 서러움을 일찍이 깨닫게 된 계기가 다가왔다. 집주인은, 우리가 더 이상 똘이를 기르지 않았으면 하고, 계속 기른다면 임대차 갱신을 하지 않겠다고 통보를 해 왔다. 부모님은, 우리가 너무 똘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었고, 정이 들었던 터라 쉽게 결정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없는 처지에 사글세를 또 얻어서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고, 집주인의 요구사항도 심각하게 부당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부모님은 우리를 설득하는 것으로 결정을 보았고, '우리보다 더 잘 기를 수 있는 사람에게 보내주자'라고 우리를 타일렀다.


똘을 어딘가로 보내기로 한 날이 다박다박 다가오자 우리의 똘에 대한 애정은 더 깊어만 갔고, 이별의 날이 다가오자 부모님은 우리가 학교에 가 있는 사이에 똘을 양도했다. 그 때 기억으로 부모님이 똘의 몸값을 받지는 않은 듯 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자 비어있는 목줄과 밥그릇이 똘이 더 이상 이곳에 없음을 알게 해 주었다. 갑자기 눈알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나는 이를 두고 지금도 '자본주의의 냉혹함을 일찍 겪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똘이 없으니 우리 삼남매는 노는데 짝이 맞지 않게 되었고, 그날 오후는 무척 더디게 시간이 흘렀던 것 같다. 부모님은 우리에게 똘이 더 좋은 곳, 더 좋은 사람들한테 갔으니 더 행복할 것이라고 애써 우리가 보낸 추억을 낮추어 말했다.


#4


그날 어둠이 깔릴 무렵, 집주인은 우리 가족더러 나와 보라고 했고, 양철대문을 박박 긁어대는 똘이 소리가 심하게 나고 있었다. 합의한 적도 없는데, 우리 가족은 '똘아!'라고 외쳤고, 똘이를 안아 주었다.


똘이 목줄을 잘근잘근 씹어서 끊어내고 자신의 회귀능력을 이용해 집까지 돌아온 것이다. 집주인은, 우리 가족이 너무 똘을 좋아하는 것을 보고 몇일 말미를 줄테니 다시 보내라고 말했다. 그렇게 1차 이별은 몇일 연기되었다. 한번 보내 봤으니 두번 보내는 것은 더 쉬울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너무 극적인 재회여서 더더욱 똘을 보낼 수가 없었다.


부모님은 똘이 돌아올 수 없도록 더 먼 곳에 누군가를 수소문해야 했고, 결국엔 그렇게 되었다. 우리는 또다시 한동안 울었고, 그리워했고, 잊어갔다. 똘이 목줄을 끊고 돌아오는 기적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5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처음에 똘이 보내진 곳은 개를 기르기 위해 똘을 데려간 것이 아니라 식용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데려간 것이었다. 아마 확실하지는 않지만 남자전용 이발소 주인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기억도 증거도 희미하다.


똘이 최초 이별에서 돌아올 수 있었던 사건을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어린 마음에 '분명 두번째 주인은 똘을 사랑해 주는 사람들'일 것이라고 믿기로 했다. 시간이 지나서 우리는 그 집에서 이사를 나왔다.


#6


후에도 몇 마리의 강아지가 우리 가족을 거쳐 갔지만, 나는 그다지 애정을 쏟기 어려웠고 다시 올 이별과 상실에 대해 방어가 본능적으로 일었던 것 같다.


특히, 2차 성징을 겪으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나는 동물털에 피부 알러지 반응을 일으켰다. 똘을 기를 때는 그런 일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너무 어려서 피부를 긁어댔던 사실을 기억하지 못 했을 수도 있다.


#7


병아리와 달리 똘은 나에게 최초의 사람 아닌 친구였고, 헤어짐이었고, 추억이었다. 지금도 우리와 똘을 생이별시킨 그 집주인이 얄밉지만, 그 때 그 일은 내게 가난을 이겨내야 한다는 처절한 각오를 품게 한 최초의 계기가 되었고, 첫 정이 깊다는 것을 깨닫게 한 계기가 되었다.


지금은 바둑이를 보더라도 똘이가 절절하게 떠오르지는 않는다. 이제는 진짜 내 강아지들이 있고, 녀석들과 시간을 보내야 하는 숙명이 내게서 감상에 젖을 수 있는 시간을 그리 많게는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서글프지만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한다는 일념뿐.


#8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88올림픽이 개최되서 우리의 관심은 올림픽 경기에 매몰되었고,이별, 상실 그런 단어와는 멀리 떨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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