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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평변호사 Dec 19. 2017

내가 더 사랑했다

일상의 변론


내가 힘들고 아리고 아픈만큼 너도 아플까. '이별을 '당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고통과 슬픔의 크기는 분명 상대보다 더 크게 느껴진다. 이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절망과 상실의 일부를 상대가 조금이라도 알아줬으면 한다. 바램이 일부라도 이루어진다면 어쩌면 이별한 연인이 다시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미련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전부일 때는 상대방의 고통도 대신해 겪고 싶다. 대신해서 충분히 아파해 줄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이별 후에는 내가 겪는 고통의 일부 또는 그만큼, 때로는 그 이상으로 상대방이 경험했으면 하는 바램이 생긴다. 내가 겪은 고통의 이상을 상대가 겪었으면 하는 바램은 분명 저주에 가깝다.


아무 의미없는 일임에도 이별 후에는 누가 더 사랑했는지 재어본다. 그리고 대부분의 결론은 내가 더 사랑했다는 결론에 이른다. 인간은 이런 면에서 지극히 이기적이다. 자기 보호본능이라는 것이 이상하게도 강하게 발휘된다.


내가 더 사랑했지만, 이 슬픈 결말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해야 한다면 가급적 나는 더 선량한 존재이고 싶다. 이별은 생물학적으로 더 이상의 호기심이 발생하지 않는 단계에, 때로는 사회학적으로 부족한 무언가(무직, 적은 소득, 집안 배경 등) 때문에 발생한다. 그 뿐이다.


만남과 이별, 그리고 또 다른 만남, 또다시 찾아오는 이별. 그 순환 사이에 어떤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단절된 관계에서 누가 더 사랑했었고, 누가 더 잘못한 것인지 논공행상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저 이 아픔을 딛고 다시 찾아올 상대를 맞이할 배려를 갖춘 성숙한 자세를 갖추었는지가 중요하다. 시간이 흘러 아픔과 상처가 망각되듯이, 다시는 사랑하지 않겠다던지 다시는 이별하지 않겠다던지의 지키기 어려운 다짐 따위는 할 필요가 없다.


기쁨, 슬픔, 고통이 닥쳐오면 그 순간에 그 감정에 충실한 것도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다. 애써 온몸으로 느끼는 감정을 되지도 않게 이성으로 억압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 이별을 맞이한 막내 여직원을 보면서 몇 자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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