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변론
"이런 꼴 보니, 너무 오래 살았나 보다 내가 죽어야지"
"죽고 싶다. 이렇게 사느니 죽는게 낫겠다"
"~~어휴. 죽겠네, 정말"
"죽을 맛이다"
예상보다 '죽겠다, 죽고 싶다' 등의 말을 심각성을 부여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말한다. 그런데, 막상 손가락 끝에 상처라도 입으면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인다. 그리고, 다소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되면 막상 죽을까봐 두려워진다.
죽음이 쉬운 문제가 아님에도 말로는 쉽게 내뱉고, 쉽게 여긴다. 당장 죽음을 맞이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안도 때문에 죽음이라는 문제가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사는 게 힘들어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죽고 싶다고 쉽게 말로써 내뱉더라도 막상 죽음이 닥쳐오게 될 상황에 처하게 되면 태도는 달라진다.
저마다 다를 수는 있겠지만, 1) 두려움이 생긴다. 죽을 가능성이 시기적, 확률적으로 현실적인 문제가 되면 일단, 두려움이 생긴다. 단 한차례도 죽음을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2)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훌륭한 인생은 아니었지만, 나름의 의미라는 것을 찾고 싶어진다. 해야 할 일들의 우선 순위가 이전보다 쉽게 정리된다. 그리고, 시간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아쉬움이 밀려든다.
두려움에 떨다가 죽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유의미한 무언가를 실천해야 겠다는 생각을 정리하고 나면 3) 슬픔이 밀려온다.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은 쓸모없는 세균이나 죄악 이외에는 슬픈 일이다. 기억에 있던 것을 다시는 경험할 수 없다는 결론은 슬픈 일이다.
투병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열심히 산다. 모든 것에 놀랄만한 절제력과 의지력을 발휘한다. 술, 담배, 중독성있는 음식 등에 대해 이전에 실천하기 힘들었던 절제를 발휘한다. 까딱하기 싫던 게으름도 운동으로 대체된다.
죽음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든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내일, 미래를 염려한다는 점이다. 다른 동물들은 내일을 계획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현재도 중요하게 여기지만 내일을 염려한다. 하지만, 그 염려할 내일이라는 것이 다시는 주어지지 않게 된다면, 죽음은 내일을 허락하지 않는 최고로 무거운 처분이다. 때문에 믿지 않던 신이나 절대적 존재에게 기도하게 된다. 시간을 조금만 더 달라거나 이 고통에서 벗어나 죽음이 좀더 먼 시기에 실현되게 해 달라고 빌게 된다.
죽음은 사고를 명료하게 만들고, 삶을 단순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이토록 무서운 효과를 발휘하는 죽음을 쉽게 여겨서는 안된다. 진실로 죽고 싶지 않으면서 죽고 싶다는 말을 습관적으로 해서도 안된다. 어차피 죽음은 일정한 속도로 다가올 것이다. 그것이 자연스럽게 올 때까지 섣불리 언행을 일삼는 일은 삼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