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변론
급작스레 몸이 아파 응급실에 실려가면 의사, 간호사들은 정직한 반응을 보인다. 정직하다는 것은 나의 고통을 최대한의 관심을 가지고 완화시켜 주기를 바라지만, 절차대로 한다는 점에서 정직하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들은 평소 응급환자를 보는 것이 일이고,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다반사이기 때문에 '응급'은 고통을 겪는 환자의 문제일 뿐이다.
사람은 결코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처럼 느낄 수 없다. 이미 뇌신경이 그럴 수 없도록 작용한다. 또한 나에게 중요한 일임을 타인에게 인식시키더라도 자신이 느끼는 심각성만큼 타인이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도 없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누가 고통을 나에게 호소하더라도 나는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정확하게 판단할 수도 없다.
나에게는 중대한 문제이지만, 타인에게는 남의 일일 뿐이다. 이 대목에서 인생의 외로움이 발생한다. 나의 문제는 결국 나의 문제일 뿐인 것이라는 점, 그리고, 같은 논리로 타인의 고통은 나의 고통일 수 없다는 것이 인생에는 어떤 부분에서 철저하게 분리시키는 벽이 있다.
가끔 착각이 발생하기도 하는데, 나의 고통을 누군가 알아주는 것 같거나 나 역시 누군가의 고통을 헤아려주는 척 하는 경우가 있다. 소중한 존재라고 느끼고 공감이나 소통이 되었다고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진실로 내게 중요하고 심각한 것들이 해결되지 않았다. 그저 기분상, 감정상 해프닝이 잠시 있었을 뿐이다.
취기에서 벗어나면 오롯이 나에게 심각하고도 중요한 문제와 고통은 전적으로 나의 문제로 남아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어제의 그 소통과 공감과 기분좋음은 어디로 갔을까.
냉정하고도 냉철하게, 그리고 독하게 사고와 감정을 확립할 필요가 있다. 이 작업은 항시 해야 한다. 피곤한 일이기도 하고 외로운 일이기도 하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라는 인간이, 외로움을 겪는 것은 분명 누군가의 그럴듯한 거짓말에 현혹된 것일 수 있다.
믿고 돌보고 위로하고 겪려해야 하는 대상은 우리 자신이다. 결코 타인일 수 없다. 너 자신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 것은 너의 외로움과 분리되어 독립된 너의 존재의 위치를 깨달아야 한다는 메세지다.
내게 중요한 것이 타인에게 중요하지 않다. 역도 참 명제다. 삶을 내 중심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