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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평변호사 Nov 30. 2019

100세와의 대화

일상의 변론

몇일동안 100세된 분과 대화를 했다. 1세기, 100년을 살아 숨쉬어온 존재와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 적지 않은 흥분이었다. 그러나, 흥분은 충만한 만족보다는 후회와 실망을 안겨 줄 뿐이다. 마치 마트에서 충동구매를 하고 집으로 돌아온 후 구매이유를 망각하게 된 그 물건에 대한 감정과 같다.


100년을 살고 싶지는 않다. 현재로서는. 다만, 죽음이 임박하면 더 살고 싶은 이유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고 하더라도 인생이 어떤 의미이며, 우리의 불행과 고통은 왜 주어지는 것인지, 모두가 행복한 상태로 지속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답을 내지 못한다.


선택하지 않은 삶, 우리 부모가 애정을 통해 성적 교합의 결과 생물학적으로 태어나서 인간은 생물학적 기초보다 더 가치있는 정신적이고 영혼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삶을 사랑하고 자신과 이웃을 돌보며 가급적 절대적 존재를 인정하면서 일관되게 살아야 바람직하다는 것이 100세된 분의 메세지의 요지이다.


지적 수준이 높아지는 존재가 될수록 불행과 고통은 커질 뿐이다. 삶의 진리를 찾을 수 없고, 참다운 행복을 정의할 수도 없으며, 스스로를 제어하는 것이 욕구와 욕망만을 절제하는 것이 아니고, 욕설을 퍼붓고 싶은 인간들이 어쩔 수 없이 섞여 돌아가는 세상에서 한계만을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 지식 때문이다.


신에게 귀의하여 일관된 가치관이나 세계관을 가지고 그 관대로 생활해 나가는 것은 어쩌면 가장 삶을 단순화시키고, 행복에 가까운 상태에 이르는 손쉬운 방법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신앙에 맡기기에는 어딘가 자존심이 상한다. 자신을 비우거나 자신을 내어맡길 때, 깨달음과 은혜가 주어진다고 배운다.


소중한 양은 바로 개별적인 자신이라고 하면서도 자신을 버려야 진정한 깨달음과 은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말이 밤새 생각해 보더라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해를 할 것이 아니라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갈증은 돈, 이름, 힘의 결핍에서 발생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것들을 만족할만한 수준으로 채워도 행복은 연속적으로 주어지지 않는 것도 분명하다. 누군가가 그것을 빼앗을 것이고, 지킬 힘은 점차 쇠약해진다. 그리고, 생물학적 기초도 무너질 뿐 아니라 지적 수준도 망실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죽기 전에 유의미한 발자취를 남겨야 한다는 숙제가 각자에게 있다는 것이다.


숙제검사가 없을 것이라고 단정한다면 이번 생이 전부라고 믿는 사람이고, 숙제검사가 있다고 믿는다면 이번 생은 수업시간인 것이다. 선택은 각자에게 있다. 100세된 분에게 숙제는 다 하셨냐고 물어보고 싶지만, 내 까짓것이 알면 얼마나 알 것이며 삶에 대해 고된 탐구를 얼마나 했겠는가.


깊어가는 가을이 44번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 사실일 뿐이다. 여전히 나보다 지적 수준, 힘의 크기, 이름의 가치가 높은 사람들이 나 자신보다 더 우리를 위해 싸움을 벌이는 개그같은 일들이 연속극처럼 연속되고, 그것을 해석하는 인간들의 해석이 난무한다.


"식사했어요?"라는 물음에 "먹었어요"라고 답하면 최상인 듯 하다. "잘 잤니?"하면 "응"하는 상황이 삶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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